두 번째 인티파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추진했던 팔레스타인과의 오슬로 평화조약은 제1차 인티파다(1987~1993)를 끝내고 평화를 되찾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유대계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라빈을 암살하고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상황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유대계의 정착촌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없애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분노는 거세어졌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마음을 산 건 폭력 저항 운동을 원하는 세력이었다.

제2차 인티파다(2000~2005)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공격으로 파괴된 이스라엘 버스 (이미지 출처: The Times of Israel)

팔레스타인의 두 번째 봉기는 첫 번째보다 (민간인과 전투원 모두)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인 식당, 버스 같은 곳에서 자살폭탄을 터뜨리는 방식은 이스라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138건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제2차 인티파다의 상징처럼 되었고, 이스라엘은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 공격으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원시적인 공격에 이스라엘이 첨단 무기로 맞서는 사진과 영상이 뉴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다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 역할은 뒤바뀌었지만.

성경에서 다윗이 죽인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수였다. 이 블레셋(Philistine, 필리스티아)은 현대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같은 지역이라서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붙었을 뿐, 둘은 서로 다른 종족이다.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사진은 인티파다의 상징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Middle East Monitor)

그렇게 5년이 흘러 두 번째 인티파다가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은 1,000명, 팔레스타인은 3,000명을 잃었다. 로넨 버그먼 기자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국민들은 보수화하면서 우익 정치인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과 협력해서 평화를 끌어내자는 견해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다.

요르단 서안 지구를 쓸어내고 정착촌을 지으면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은 아리엘 샤론은 2001년, 그런 정치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다. 군인 출신의 샤론은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정착촌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사람이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인한 보복 공격으로 악명높았다.

무엇보다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이 평화 회담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이 그런 샤론을 총리로 선택한 건 무력을 사용해서 팔레스타인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신호였다. 첫 번째 인티파타 때 평화를 원했던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하지만 샤론이 총리가 된 후 이스라엘 국민은 또 한 번 충격을 받게 된다.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를 제압해 줄 것으로 믿었던 그가 완전히 방향을 전환해 팔레스타인이 독립 국가가 되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돌변에는 두 국가 해법을 꾸준히 설득해 온 미국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제 사회에서 받는 압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샤론은—그가 이제까지 지지해 온—불법적인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리쿠드당 출신의 아리엘 샤론은 정치적으로는 노동당 출신이었던 이츠하크 총리와 반대쪽에 있었지만, 정착지와 관련해서는 똑같은 해법, 즉 추가 건설 중지를 내놓았고,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똑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정치인은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성장하지만, 권력을 잡고 실제로 통치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면 관리해야 할 일은 많아지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여지는 좁아진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총리들은 대개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아리엘의 평화안은 한술 더 떠서, 수십 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가자지구에서 정착촌을 철거하고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분노했고,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파괴하려는 등의 모의를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결국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모두 철수했고, 2차 인티파타는 끝났다.

가자의 정착촌에서 철수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군과 대치하다가 끌려 나오는 민족주의 유대인들 (이미지 출처: Ynet News, Britannica, Haaretz, Towson University)

여기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이스라엘은 왜 가자 지구의 정착촌만 철거했을까? 요르단 서안에는 더 많은 정착촌이 건설되지 않았나? 아리엘 샤론은 요르단 서안은 민족주의자들에게 양보하기로 한 걸까?

아니다. 샤론은 요르단 서안 지구에 있는 정착촌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샤론 총리의 명령은 어쩐 일인지 현장에서 이행되지 않았다. 이유는? 관료조직에 스며든 극우 민족주의자 세력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명령이 하달되는 것을 저지했기 때문이라는 게 로넨 버그먼 기자의 설명이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정부는 겉으로는 정착촌이 불법이라고 말하면서 비밀리에 정착민을 지원해 왔는데, 총리가 느닷없이 정책을 바꿔서 철거를 명령하자 복지부동에 들어간 것이다.

정권 내부에서 이런 반발에 부딪힌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샤론 총리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고,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같은 멜로디의 변주처럼 들린다. 총리는 상식적인 해법을 찾아 평화안을 도출하지만 극우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고, 총리는 죽고, 평화안은 실패한 후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정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민간단체나 관료 조직 속에서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들의 저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리엘 샤론의 정치적 돌변 이후로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은 생각을 바꾼다. 정착촌 건설을 그렇게 열심히 지지했던 샤론 같은 우익 정치인이 총리가 되어 마음을 바꿨다면, 앞으로 누가 권력을 잡든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결국 요르단 서안 지구에 남은 정착촌들도 철거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대법원, 법무부, 군 등 각종 헌법기관들이 언제라도 철거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면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직접 들어가 권력을 잡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극우 민족주의자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법학을 공부한 후 오츠마 예후디트(유대인의 힘)라는 작은 정당을 만들었고, 가자 지구 철수 때 고속도로를 파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소되지 않은 또 다른 극우 인사 베잘렐 스모트리히 역시 극우 정당을 통해 정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벤그비르는 이스라엘의 공안부 장관, 스모트리히는 국방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겸직하고 있다.

극우 정당을 통해 의회에 진출한 후 네타냐후 정부에서 장관이 된 극우 민족주의자 벤그비르와 스모트리히 (이미지 출처: The Times of Israel)

한때 이스라엘 유권자들의 눈에 과격 세력으로 보였던 이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내각의 일원이 된 데는 네타냐후 총리의 부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과거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미디어 갑부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기소되었고 결국 실각했다. 네타냐후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총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가 속한 리쿠드당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다른 당과 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 하지만 다른 정치인들은 네타냐후와 엮이고 싶지 않았고, 결국 그는 이타마르 벤그비르, 베잘렐 스모트리히와 손잡고 극우 연정을 만들어 내어 다시 총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집권한 2022년 이후 이스라엘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 편에서 알아보자.


마지막 편 '극우의 이스라엘 장악 ⑥ 포그롬'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