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이스라엘 장악 ③ 전개
• 댓글 남기기1973년에 탄생한 이스라엘의 우익 정당인 리쿠드가 1977년 연정을 통해 집권하면서 이스라엘 최초로 우익이 다수인 의회가 탄생했다. 그 결과로 총리가 된 리쿠드의 당수는 메나헴 베긴 총리로, 젊은 시절—즉,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전—무장 조직에 소속되어 아랍 세력을 공격하는 데 가담했던 사람이다.
1977년이면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3차 중동 전쟁 10주년이 되는 해다.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그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시나이반도, 가자 지구, 요르단 서안 지구, 골란고원—에서 불법 정착촌을 넓히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군과 정부는 이를 묵인해 왔다. 베긴 총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베긴은 일종의 절충안을 마련했다. 먼저, 한 관료가 찾아낸 100년 넘은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의 법을 선례로 삼아 오래도록 주인이 경작하지 않은 땅이 국가에 귀속된다는 원칙을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100개가 넘은 정착촌을 합법화했다.
베긴 총리의 평화안
하지만 베긴은 그와 동시에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시간이 오래 걸린 협상이었지만, 이렇게 체결된 조약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빼앗은 시나이반도를 돌려주었고, 그 대가로 이집트와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시나이반도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모두 철거하기로 했고, 이 평화 조약에 서명한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믿었던 우익 정권이 내린 이 결정에 구쉬 에무님을 비롯한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정착촌 건설을 주도한 구쉬 에무님의 리더 중 하나인 랍비 모셰 레빈저는 TV 방송에 나와 "아랍인들이 다시는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위협은 빈말이 아니었다. 구쉬 에무님은 그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이면 이스라엘 정부는 점령지를 계속 반환할 것으로 보았고, 이를 막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구쉬 에무님 중에서도 과격한 사람들로 구성된 테러 단체("Jewish Underground")는 요르단 서안 팔레스타인 거주지의 시장(市長) 세 명을 죽이려고 그들이 타는 승용차에 폭탄을 설치했고,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폭발로 두 명이 하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 끔찍한 테러를 접한 이스라엘의 군과 정부는 규탄 성명을 내기는커녕 "폭탄을 좀 더 높게 설치해야 했다(=살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농담을 하며 반기는 기색이었다. 정부가 암묵적으로 범죄를 옹호하는 분위기를 구쉬 에무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결국 이런 종류의 팔레스타인 공격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이스라엘 전체가 유대인에 의한 테러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은 이런 일이 멀리 떨어진 점령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도 텔아비브의 법학 교수 몇몇이 이스라엘의 검찰총장에게 유대인들이 벌이는 범죄, 테러 행위를 고발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검찰총장은 검사 한 명에게 이를 조사하라는 특별 임무를 맡겼다. 에후디트 카프라는 이 검사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서 법학 교수들이 문제를 제기한 사건들을 수사하면서 문제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련 기관들은 사건을 수사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단순한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였다. 카프의 조사 결과로 작성된 보고서가 이스라엘 관련 기관의 문제를 지적한 건 당연한 일이다.
유대인들의 테러가 이어지는 걸 이스라엘이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이 일 것이 분명했지만 예후디트 카프 검사가 이를 수사할 수 있었던 건 내각에서 검찰의 수사를 지지하고, 그 결과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수사를 마치고 33페이지 분량의 보고서가 나왔고, 내무부 장관이 예후디트 카프를 집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카프는 보고서의 내용을 알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 찾아갔지만, 그 장관은 험한 말로 카프의 조사 활동을 꾸짖었다. 카프는 장관의 말을 들으며 정부가 자기의 보고서를 묻으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기가 순진하게 생각했다고 판단한 카프는 조사위원회에 사표를 낸다.
첫 번째 인티파다
이렇게 이스라엘 정부의 암묵적 지지 하에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고,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 정착촌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그러던 1987년, 참다못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대규모 항쟁을 시작한다. 제1차 인티파다(아랍어로 '봉기')였다.
발단은 이스라엘군의 트럭이 민간인의 차량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네 명이 숨지는 사고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보다 며칠 전에 일어난 유대인 살해 사건에 대한 군의 의도적인 보복 행위였다고 믿었다. 이들은 돌과 화염병을 이스라엘 병사들을 향해 던지는 등의 폭력 시위와 더불어 납세 거부 및 이스라엘 제품에 대한 보이콧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이스라엘은 군인 8만 명을 배치해서 이들과 대립했고, 무력 충돌이 이어져 2,0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스라엘 측에서도 300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분쟁이 4년 넘게 지속되면서 이스라엘 국민도 지치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이 사태를 끝내고 싶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92년, 이스라엘의 노동당이 집권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이츠하크 라빈이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다. 분쟁을 끝내라는 이스라엘 유권자들의 요구였다.
이츠하크 라빈은 비록 진보 정당의 당수였지만, 2차대전 때 프랑스의 친나치 비시 정부에 맞서 싸웠고, 무엇보다 이 모든 문제가 시작된 1967년 제2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 이스라엘 육군을 지휘해서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 지구를 점령한 장본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런 라빈 총리가 팔레스타인과 화해하는 결정을 한다면 이스라엘 유권자들도 수긍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분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합의안을 만들어야 하고, 그 협상 상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the 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가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합의안에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점령지에 세운 정착촌의 철거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이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애초에 정착촌을 강행했던 이유가 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우선 새로운 정착촌의 건설을 동결했고, 비밀리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접촉해서 훗날 오슬로 평화조약으로 알려진 합의안 도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중동 정세를 안정시키려는 미국 정부의 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 합의에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설립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그걸 향해 가는 로드맵이 그려졌다. 라빈 총리는 이를 위한 노력이야 말로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양측은 오슬로 평화조약은 1993년과 1995년, 두 번에 걸쳐 단계적으로 서명했고, 1994년에는 라빈과 아라파트 두 사람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때는 정말로 길고 긴 싸움이 끝나고 이 지역에 평화가 찾아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조약은 재난과 같았다. 1967년 이후로 종교적 열정으로 추진해 온 정착촌 사업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80년대 베긴 총리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며 남은 점령지가 반환되는 것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하겠다고 다짐했다.
'극우의 이스라엘 장악 ④ 학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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