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의 혁명 ①
• 댓글 남기기페이스북에서 국제 정세와 관련한 좋은 글을 포스팅하는 외교안보연구원의 인남식 교수가 지난주 자신의 계정에서 "(이란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젊은 여성이 50%이며, 현재 수도 테헤란에서는 젊은 여성의 70% 정도가 히잡을 쓰지 않는다"라는 지인의 말을 전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된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의 이란 풍경이다.
인교수가 포스트에서 소개한 지인의 사진에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지하철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친구 공개로 올린 사진이라 이곳에는 게재하지 못하지만, 지난 12월에 찍힌 아래의 사진을 보면 젊은 이란 여성들의 집단 행동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전통적 사고와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흔히 그렇듯, 이란에서도 여성의 자유는 정치적 쟁점이 된다. 그런데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재 권력과 싸우는 민주주의 운동과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과 달리, 이란에서는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 때마다 여성의 권리, 특히 교육과 복장의 자유가 항상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 왔다. 지난 1년 동안 이란에서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가장 크게 외친 집단 중 하나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란의 독재 권력과 이란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독재자는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다'라는 식의 이차원적 구도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정이 있고, 여성의 권리를 제약한 결과로 오히려 진학률이 증가한 특이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란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그들의 저항은 세상 다른 모든 곳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내용은 뉴요커에서 최근 소개한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전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고, 이해를 위해 내용의 순서를 조금 바꿨지만, 원문에 최대한 충실하게 옮겼다. 이 글을 쓴 아자데 모아베니(Azadeh Moaveni)는 이란계 미국인 저널리스트다.
이란에서 여성의 교육은 지독하게 정치적인 이슈다. 영국이 도운 쿠데타를 통해 카자르 왕조를 끝내고 집권한 레자 샤 팔라비는 1925년에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팔라비 왕조를 세운다. 세계 역사에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나라의 이름을 '이란'으로 바꾼 것도 이 사람이다. 그는 여성을 이란 현대화 프로젝트의 중심에 두었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베일을 쓰는 것을 금지했고, 여성의 대학 진학을 허용했다.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라비의 지배 기간(1941~1979) 동안 이란의 여성들은 투표권을 얻었고, 피선거권을 얻어 의회에 진출했고, 결혼과 관련한 여성의 권리에도 많은 개선이 있었다. (물론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등의 제약은 남아있었지만, 미국에서도 1974년까지는 여성이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남편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버지 레자 샤와 아들 모하메드 레자는 자신의 지배에 반대하는 수천 명을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인 독재자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란 사람들은 압제적인 정권이 강요하는 서구화에 반발하게 되었고, 팔라비 왕조 하의 여권 신장을 "국가 주도의 페미니즘(state feminism)"이라 불렀다. 국민들은 힘을 규합해 정부에 반대했고, 결국 팔라비 왕가를 이란에서 몰아내고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여성들은 정부의 방침에 반대해 검은 차도르를 입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이란에서는 베일이 독재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왕정의 독재를 끝내고 권력을 잡은 이슬람 과격 세력은 이란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면서 여성이 남성에 복종하는 전통적 관계를 그 핵심에 두었다. 이들은 팔라비 왕조가 여성들에게 주었던 법적 권리를 빼앗고, 일부다처제와 아동 결혼을 되살렸다. 그리고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베일을 써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1980년 5월, 팔라비 왕조 시절 장관을 지낸 여성 중 하나인 파루흐루 파르사가 이슬람주의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사라졌다. 교과서에 허용된 여성의 이미지는 이슬람 복장을 하고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남성과 여성이 분리되는 장면에서였다.
이후로 베일을 쓴 여학생의 모습은 '모범적인 이슬람 시민'을 만들어 내려는 이란 체제의 상징이 되었고, 이를 서구에 잘 설명한 작품이 2007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이슬람 혁명으로 여성의 권리가 축소되면서 농촌 지역을 비롯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집안 출신의 여자아이들이 대거 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한 거다. 이는 대학교 진학으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77년에 3%에 불과했던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2015년에는 67%에 달했다. 왜일까?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던 팔라비 왕정 시절에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두려워했던 부모들이 이란 사회가 보수 종교화하자, 안심하고 입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받아들인 여성들이 대학을 나온 후 마주하게 된 이란은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였다. 가부장 중심의 시스템이 남아있는 이란에서 남성들은 아내가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여성들은 자기가 받은 고등교육을 써먹을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중동지역을 연구하는 나르게스 바졸리(Narges Bajoghli) 교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은 자신들이 만든 정책의 결과로 의도치 않게 새로운 여성 집단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학교와 사회 분위기를 통해 알게 된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란 정부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 테헤란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젊은 여성들이 베일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이란의 정부가 권위를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글쓴이)는 지난 3월에 수도 테헤란을 방문했는데, 머리에 아무런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쇼핑을 하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지하철을 타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심지어 라마단(3월 22일~4월 20일) 기간 중에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젊은 여성들이 모스크 앞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걸 봤다. 이들은 거의 매일 같이 그곳에 나와 보란 듯 담배를 피웠고, 결국 모스크에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철제 바리케이드를 세워야 했다.
이제 테헤란에서 검은색 차도르는 종교적 신념의 상징이 아니라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조의 상징이 되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항상 차도르를 입고 다녔는데 이제는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된 후로 차도르를 입고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사람들이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비난 댓글을 달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가 사는 보수적인 동네에서도 차도르를 입고 다니다 놀림을 받았단다.
이란의 여성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베일을 거부할 때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규제를 풀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다른 많은 권위주의 정권이 그러듯–오히려 더 강력하게 단속하며 수천 명을 체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500여 명을 학살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몇 달 전만 해도 히잡을 강요하지 말라고 요구하던 시민들은 이제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를 가장 난감하게 만들고 있는 건 어린 여학생들이다.
'여학생들의 혁명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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