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조금 다른 버전이 '실리콘밸리가 군수산업에 뛰어들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61년 1월, TV 방송에 등장해 퇴임에 앞서 대국민 고별 연설을 했다. 아이젠하워의 연설은 국민들의 기분과는 달리 엄중한 경고 메시지에 가까웠다. 당시 미국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 40대 기수 존 F. 케네디의 취임을 기다리며 흥분해있었기 때문에 퇴임하는 대통령의 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겠지만, 아이젠하워의 그날 연설은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그의 경고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였다.

전쟁으로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군과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군수 업체들 사이의 결탁으로 시민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가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경고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군 총지휘관 출신의 공화당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언뜻 믿기 힘들다. 1950년대만 해도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의 견해 차이는 지금처럼 극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미국의 현대사를 보면 그의 경고는 완전히 무시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거대한 군수 산업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군수 기업들은 미국의 정치를 좌우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미국의 군수 산업은 전투기와 미사일, 군함과 탱크를 만드는 기업들이 주도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록히드마틴이나 보잉, 레이시언 같은 기업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각각 매출 수백억달러를 올리고 있다. 이미 1961년에 아이젠하워가 “최신형 폭격기 한 대 가격이면 학교 30개를 지을 수 있고, 구축함 한 척을 지을 돈으로 8000명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 단지를 지을 수 있다”고 했을 정도로 군수 산업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전투 환경과 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군이 요구하는 기술도 변화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군수 업체들은 새로운 요구 사항을 맞추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이 거대한 군수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가 개발한 증강현실(AR) 헤드셋을 미 육군에 10년에 걸쳐 공급하는 약 220억달러, 우리 돈 약 24조원짜리 초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많은 테크 기업이 수익을 확신하지 못한 상황에서 증강현실에 투자하는 동안 마이크로소프트는 10년 동안의 매출을 확보하고 멀리 앞서 나가게 된 것이다. 일반 소비자들에게 일일이 팔아야 하는 장사와 달리 정부와 계약 한 번으로 게임이 끝나는 군수 산업에 테크 기업들이 군침을 흘리는 이유다.

사실 디지털 테크 기업들의 군수 산업 진출은 벌써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진보적인 문화를 가진 실리콘밸리의 특성상 내놓고 계약을 따내지 못하고 전통적인 군수 업체의 파트너로 몰래 참여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디지털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 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직접 계약을 따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019년 미군의 통합방위 인프라 사업인 제다이(JEDI) 계약이다. 100억달러에 달하는 이 대규모 사업은 클라우드 컴퓨팅이 핵심 역량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누구나 아마존 웹서비스(AWS)가 따 놓은 당상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인 제프 베이조스가 이끄는 아마존에 이 계약을 넘기고 싶지 않았고, 결국 계약은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갔다. 아마존은 정치적인 결정이라며 현재 무효 소송을 진행 중이다.

현재 테크 기업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앞서 있지만, 구글과 페이스북,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유일한 친트럼프 기업인으로 유명한) 피터 틸이 설립한 팰런티어 등의 기업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대한 군수 시장에서 경쟁 중이다. 다만 직장 내 발언권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구글 같은 기업들은 직원들이 집단행동으로 군을 상대로 한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못 하는 상태다.

역사적으로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정부의 사업과 실리콘밸리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끈끈하게 유지되어 왔다. 대표적인 테크 기업인 오라클의 경우, 설립자 래리 엘리슨이 1977년에 미 중앙정보부(CIA)의 프로젝트로 시작했고(오라클은 그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이었다), 세계 1위의 군수 기업 록히드 마틴은 1980년대까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이었다.

정부의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인터넷 자체가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만들어낸 기술을 민간에 허용한 것이고,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에 사용되는 GPS 기술 역시 미 해군연구소가 개발하고 미 공군이 운용하는 시스템을 기업들에 공개한 것인 만큼 미국 정부의 돈과 기술은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키운 자양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기업들이 소비자를 상대로 한 제품과 서비스로 돈을 벌면서 실리콘밸리는 군수 산업을 비롯한 정부 프로젝트와는 한동안 거리를 두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테크 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상대로 미군을 현대화, 디지털화해야 하는 미국 정부의 요구와 공룡처럼 커진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새로운 먹거리 창출 필요성이 맞아떨어지면서 미국 정부와 실리콘밸리는 이제 다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