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 ②
• 댓글 3개 보기베니스 비엔날레의 각 나라 전시관은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되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한국관도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된다.) 특히 오래된 힘 있는 서구 국가들의 경우 웅장한 고전양식의 건물을 갖고 있는데 이런 대형 국가관에 출품하도록 선정된 작가가 느낄 부담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선정할 때 이미 공간을 고려하겠지만, 작가는 자기 나라 국가관의 특성을 살려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기존의 작품을 가져다가 배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작가들이 이 비엔날레를 위해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다르게 생긴 골프 코스에서 승부하는 프로 골퍼, 불규칙한 외야를 가진 야구장에서 경기하는 메이저리그 선수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실력을 발휘해서 인정을 받는 프로의 세계인 셈이다. 영화감독이 제한된 상영 '시간'을 효율적으로 채워야 하듯, 비엔날레의 예술가는 자기가 부여받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의 사진에서 프랑스관과 독일관 중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관객 각자 판단할 영역이지만, 밝은 빛이 들어오는 건물 전면에 LED 화면을 설치한 프랑스관 앞에서 발길을 멈추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면 독일관 전면에 쏟아 놓은 흙 무더기와 거기에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에르산 몬탁(Ersan Mondtag)의 작품—앞에서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춘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작가 줄리앙 크뢰제(Julien Creuzet)가 에르산 몬탁보다 떨어지는 작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캔바스 앞에서 확신이 없어 끙끙 앓는 화가처럼 전시관 안팎을 서성이며 고민에 빠진 참가 작가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현대 예술가 역시 결과를 내야 하고, 그 결과로 평가받는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그들과 그들의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가령 대부분의 국가관들이 설치 미술작품을 보여주고 있는데, 프랑스관과 독일관의 작가들은 모두 전시관 내부를 뒤흔드는 음향을 사용한다. 다양한 빛과 색을 가진 작품에 더해 귀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음악은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가들이 요란한 폭발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 마블의 영화감독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가관으로 치면 인기 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정치적인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거다. 이스라엘관의 작가는 항의의 의미로 현재 하마스에 잡혀있는 인질 석방의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 전시하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붙였고, 테러를 염려한 듯 비엔날레에서 유일하게 군인이 배치되어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관은 문이 활짝 열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다. 누가 앞에서 항의하거나 보이콧을 주장하는 것도 아닌데도 텅 비어있다. (바로 옆에 있는 일본관은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서 더욱 비교된다.)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발언이 철저하게 통제, 검열되는 나라에서 '허락해 준' 작품을 보고 싶지 않은 거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 나는,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온 예술 작품을 보고 싶을까?
사상이 통제된 나라는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상이 검열, 통제되는 나라의 작품 수준은 그걸 검열하는 사람의 수준에 맞춰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예술을 모르거나, 그 이해력이 현저하게 낮은 사람들이다.
"히틀러가 젊은 시절 예술학교에 낙방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2차 대전을 피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어봤을 거다. 실제로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했지만, 실력은 그저 그랬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판단할 수 있으니, 여기에서 그가 그린 그림을 직접 보고 과연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이 보이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히틀러가 화가로서 자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건 단순히 그의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 젊은 시절이니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의 진부한 시각을 지적한다. 20세기에 들어온 시점에 잘해야 그림엽서 정도로 팔릴 만한 진부한 시선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내가 미술학교 교사라도 입학시키고 싶지 않았을 거다. 기술은 성장시킬 수 있지만, 시각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훗날 나치는 히틀러의 진부한 시각을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대 미술의 위대한 작품들을 "퇴폐 미술(Entartete Kunst)"이라고 규정하고, 이 작품들을 조롱하는 순회 전시회를 개최했다.
훌륭한 시각 예술가는 남들과 다른 시각/생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것을 남들도 똑같이 느끼도록 해주는 솜씨/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농담에 비유해 보면, 자기가 아는 재미있는 농담을 유난히 재미없게 전달해서 김을 빼버리고 농담을 망치는 친구를 떠올려 보면 잘 전달하는 재주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농담은 잘하는데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농담들만 가득한 페북의 중년남들을 생각해 보면 재주가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술가도 다르지 않아서, 작품은 참 멋지고 잘 만들었는데 누구나 충분히 생각할 수 있거나, 진부한, 혹은 유행을 타고 있는 아이디어를 남들보다 뛰어난 솜씨로, 혹은 재단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큰 스케일로 만든 사람들이 있다. 어떤 아이디어는 크기가 크지 않으면 구현이 되지 않지만, 어떤 아이디어는 작품의 크기가 작아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규모를 키우거나 자극적인 소리, 극적인 조명을 마구 쏘아댄다고 해서 관객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비엔날레의 국가관 중에 이런 경우가 제법 많다. 단순한 아이디어로 거대한 방, 혹은 건물을 채우느라 크기를 키우거나 개수를 늘린 작품을 보면 작가가 위에서 말한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가는 아주 신선한 시각을 갖고 있어서 언뜻 평범해 보이는 회화 작품만으로도 그 어떤 작품들 보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루마니아관에서 선보이는 화가 세르반 사부(Şerban Savu)가 그 사람이다.
루마니아관은 관람객의 인기 동선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비엔날레의 양대 행사장 중 하나인 자르디니(Giardini) 공원에서 맨 뒤, 구석에 있다. 아래 지도에서 주 전시장과 주요 국가관들이 모인 곳이 있고, 오른쪽 위를 보면 P.VE라고 표기된 베니스관이 세르비아관(RS), 이집트관(EG), 폴란드관(PL), 루마니아관(RO)을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는 게 보인다. 미술계에서 작은 나라들은 이렇게 한 지붕 아래 모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루마니아관에 얼마나 관심이 없느냐면, 블룸버그에서 만든 비엔날레 안내 앱에도 오디오 가이드를 넣지 않았다. 일단 방문객들이 작은 운하를 넘어 뒤쪽까지 모두 가지 않고, 간다고 해도 제일 구석에 세들어 있는 루마니아관까지 가는 사람들은 더욱 적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들르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도장 찍는 심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들어간 후에 보게 된 장면도 크게 눈길을 끌지 않았다. 가뜩이나 공산주의 국가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루마니아관인데 칙칙한 회색으로 칠한 벽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벽화가 아니라 각 작품이 쏙 들어가게 벽을 따로 제작한 것일 뿐, 기존에 제작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일종의 개인전, 혹은 회고전 형식이었다. (이것도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우울한 작품은 얼마든지 봤고, 회화 작품에서 삭막한 풍경 속에 작게 등장하는 사람들(혹은 비슷한 묘사)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날 비엔날레에 할애한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따라다니던 아내도 지쳐서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해서 (나와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벽에 심심하게 걸려있는 작품들을 휘리릭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그림 속 뭔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림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묘한 요소가 있는데 잡힐 듯, 말 듯 애매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모르는 채로 나갈 수 없어서 마음을 바꿔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관심이 생기니 그제야 화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세르반 사부(Şerban Savu). 아마도 이미 유명한 화가이겠지만—그래서 베니스까지 왔겠지만—요즘 미술을 열심히 볼 시간이 없는 나로서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좋았다. 이 전시의 제목이 'What Work Is(일이라는 것은)'이었는데, 일을 생각하는 그의 시선이 무척 흥미로웠다. 아래의 두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왼쪽은 세르반 사부의 2015년 작 'Guardian'으로, 미술관 경비원이 "일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미국 정부가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추진한 뉴딜(New Deal) 정책의 일환으로 작가, 예술가들에게 일감을 주기 위한 프로젝트(Works Progress)의 지원을 받고 로버트 램딘(Robert Lambdin)이 1936년에 그린 작품이다. 나는 사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졸고 있는 미술관 경비원을 미국에서도 많이 봤지만, 램딘이 그린 것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근육질의 우체국 직원은 본 적이 없다.
사실 뉴딜의 지원을 받은 1930년대 미국의 작품들 중에는 비슷한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들이 많다. 한 쪽은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다른 쪽은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둘 다 노동자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프로파간다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반면 사부의 그림은 그런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붕괴한 후 완전히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그렇다고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남아있는 루마니아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사부의 그림이 그런 루마니아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좌절과 불행을 그리고 있었다면 내 호기심을 특별히 자극하지는 않았을 거다. 예술가가 보여 주지 않아도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사연이라면, 나처럼 시간이 많지 않은 관광객은 빠르게 보고 지나친다.
20세기는 일, 노동과 관련한 다양한 이미지를 쏟아냈다. 20세기 초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같은 모습으로 대결했고, 중반을 지나면서는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작품, 혹은 "노동의 해방"을 부르짖는 작품들이 나왔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부여하는 굴레가 있다. 앞서 말한 '검열'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작가의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굴레다.
그렇다면 그런 굴레가 없는 세르반 사부는 루마니아 노동자들에게서 무엇을 봤을까? 우선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을 노동자라고 부르는 건 그다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전시회의 제목이 'What Work Is'이고, 등장인물들이 많은 경우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부의 그림은 그냥 "사람들이 일을 하는" 장면이지, 노동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널널해" 보인다. (이건 엄밀하게 말하면 '노동자'라는 표현이 역사적으로 갖게 된 함의 때문이다.) 이들은 뭔가를 하다가 앉아서 딴짓을 하면서 쉬고 있기도 하고, (미술관 경비원처럼) 일 자체가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는 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어떤 그림에서는 도대체 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기도 하다.
이건 나만의 인상이 아니다. 전시장 벽에 있는 설명에도 "일과 휴식 사이의 구분이 없는 것이 사부 작품의 주제(he indistinction of labor and leisure is one of Savu's central themes)"라고 말한다. 아래 그림에 등장하는 이 남자는 텃밭에 지지대를 만들다가 쉬는 건지, 아니면 햇볕 아래에서 선탠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둘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둘이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현대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르반 사부가 노동자의 천국을 묘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그저 천천히 일하고, 간간이 쉴 뿐, 마르크스가 꿈꿨던 것처럼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혹은 그곳에 편입하지 못한 루마니아 사회에서 충분한 봉급을 받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러나 경제적 생산 효과는 크지 않은 일을 아무런 서두를 이유 없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우울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와 고립된 사회에서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봤을까 찾아봤다가 흥미로운 해석을 만났다. 그의 그림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같은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들의 목가적 분위기를 닮았다는 것.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닮은 것은 구도나 소재가 아니다. 사부가 푸생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푸생의 그림 중에서도 인물이 작게 들어가는 목가적인—그러나 자세히 보면 극적인—분위기의 풍경화를 특히 좋아한다. 푸생의 그림에 배어나는 '무너진 문명이 남긴 흔적을 보면서 느끼는 애잔함'은 어떤 화가도 흉내 내지 못한다. 푸생과 비교한 분석은 사부의 풍경 속의 애잔함 역시 사라진 제국(소비에트 연방)이 남긴 흔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세르반 사부의 그림에서 잡힐 듯 말 듯 남아있던 무엇, 나를 루마니아관에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은 건 바로 내가 푸생을 좋아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목가적인 풍경도, '슬픔'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무엇이 사라진 세상에서 조용한 삶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는 화가의 시선, 그들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읽어내고 관객도 그걸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빼어난 솜씨가 그거다.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비엔날레에 오게 된 것도 기쁘지만, 화려한 빛과 음향의 설치작품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작가가 캔바스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였다는 사실은 회화라는 매체(medium)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해줬다. 진부한 건 생각이지, 매체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