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에 왔던 이탈리아에 다시 올 기회가 생겼다. 아내가 일 때문에 이탈리아에 가게 된 김에 함께 열흘의 일정으로 베니스와 로마, 피렌체를 돌기로 한 거다. 그래서 먼저 베니스에서 2박을 하게 되었다. 숙소는 베니스 관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B&B로 정했다. 에어비앤비가 보편화된 세상에 진짜 B&B(bed and breakfast)는 시대착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보면 베니스라는 도시 자체가 시대착오 같은 곳 아닐까? 500년 전 모습을 바꾸지 않고 우리 같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니까.

베니스의 풍경 (이 글에서 출처 표기를 하지 않은 이미지는 모두 글쓴이의 사진)

아내가 숙소를 정할 때만 해도 베니스 중심에 있고, 다녀간 사람들의 평가가 아주 좋았다는 정도가 결정의 기준이었는데, 도착한 즉시 방문객들이 좋아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숙소 바로 앞에 마리아 칼라스 다리(Ponte Maria Callas)라는 작은 다리가 있는데, 작은 뱃길 네 개가 이 지점에서 만난다. 덕분에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가 끊임없이 이 앞을 지나는데, 곤돌라에 동승한 노래꾼이(곤돌라를 빌릴 때 얼마를 더 내면 함께 탄다) 아코디언이나 기타로 연주를 하거나 타고난 게 아닐까 싶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좁은 뱃길 주변에 있는 건물 벽에 부딪혀 울리는 이들의 노랫소리가 닫힌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서늘한 방 침대에 누워 시차에 밀린 낮잠을 청하던 나를 간간이 깨운다.

이런 게 천국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낮잠에 빠진다.

우리가 묵은 B&B의 창밖 풍경

물려받은 집으로 2002년에 B&B를 시작했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우리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메일을 보내어 도착 시간과 방법을 꼼꼼히 챙겼다. 수상버스 1번을 타고 오라고 누누이 설명했음에도 우리가 (구글 지도를 따라) 2번 수상버스를 타고 리알토(Rialto) 다리에 내려 꽤 많이 걸어서 도착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은 듯했지만, 알고 보니 원래 웃는 표정 없이 잘 챙겨주는 스타일이었다.

도착한 날은 베니스 관광의 기본인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을 돌았다. 줄이 길지만 가이드를 대동하면 건너뛰는 상품을 선택해서 30년 전과 달리 여유 있게 내부도 구경했고, 성당 내부 벽화 중 비잔틴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을 구분하며 세월을 가늠했다. 과거에도 가까운 과거와 오래된 과거, 아주 오래된 과거가 있다. 30년 전이 있고, 500년 전이 있고, 800년 전이 있다. 누구나 지금 이 장소를 들렀다가 갈 뿐이다... 라고 세상을 떠난 철학자들이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누구나 나이가 들어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비로소 느끼고 이해한다.

둘째 날은 주인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로 시작했다. 매일 반죽을 사 와서 굽는다는 따뜻한 크루아상이 너무나 맛있었고, 미국 조지아주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과의 대화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우리가 먹고 있는 테이블 위 천정에 있는 프레스코였다. 55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 그림이 아무렇지도 않은 B&B 집 안에 또렷하게 보존된 건 프레스코 기법의 우수성을 보여주지만, 바로크 초기 정도로 짐작되는 이 그림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 프레스코 그림이다.

베니스는 이탈리아 관광의 3대 도시 중에서 볼거리가 가장 적은 곳이라고 하지만—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거다—수상 도시라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개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바로 비엔날레의 도시라는 사실. 2년에 한 번 열린다는 의미의 비엔날레(Biennale)는 보통 미술 비엔날레(Biennale Arte)를 가리키지만, 지금의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아트(미술) 비엔날레부터 시작해서, 베니스 영화제, 댄스 비엔날레, 음악 비엔날레, 연극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들이 모두 포함된다. 2024년은 미술 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여서 가려고 표를 샀는데, 마침 매년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Biennale Cinema)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베니스에 와서 이 두 문화 행사를 모두 맛보기로 했다.

이제부터 하려는 건 아트 비엔날레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몰랐던 작가를 알게 된 얘기다. 가볍게 읽어 보시라는 의미에서 전체 공개로 쓴 글이다.

베니스의 아트 비엔날레는 1895년에, 음악, 영화, 연극 페스티벌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잘 아는 것처럼 비엔날레는 이름 그대로 2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이고, 전 세계 비엔날레의 기원("great mother")이 바로 베니스 비엔날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의 올림픽 같은 행사가 되었다. 그해의 주제전이 열리고, 주제전 행사장 두 곳을 중심으로 각 나라의 국가관이 흩어져 있는데 이 국가관에서 자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비엔날레의 전반적인 모습은 이곳을 다녀온 동아일보 김민 기자의 기사 몇 개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큰 인기를 끈 일본관의 경우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이 예술감독을 맡아 화제가 되었는데, 이분은 2023년 광주 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인터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예술감독을 맡는 게 특이한 일은 아니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Foreigners Everywhere (공식 번역: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로, 난민과 이민으로 국경을 넘는 이동이 많아지는 요즘 상황이나, 미술 비엔날레라는 행사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도처에 외국인이 널렸다"라는 의미의 Foreigners Everywhere는 단 두 단어로 주제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이 문제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함축적으로 드러내 준다. 특히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과잉 관광 문제)으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있는 베니스에서 열리는 행사여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주제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식으로 표현하면 오버투어리즘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세계 여행을 하면서 생기는 일이다. 에코는 휴대폰이든, 자동차든 소수의 부자들만 사용할 때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사용하면서 공공장소가 시끄러워지고 교통정체가 발생하는 거라고 했다. 그의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나온 글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건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다. 소수의 부자 나라 사람들만 여행할 때는 낭만이고, 그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자 서구에서 '오버투어리즘'이라는 경고나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관광지가 되는 지역 주민들이 겪는 고충을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인 건 맞다.

뉴욕 길거리에서 "카네기홀에 어떻게 가나요?"라고 길을 물으면 "Practice, practice, practice (연습하고, 연습하고, 연습해야죠)"라는 말을 듣게 된다. 오래된 농담인데 실제로 뉴요커들은 기회만 되면 사용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실력을 발휘해서 자기 나라에서의 인기를 넘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예술가가 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이 뛰어난 작품이고, 어떤 예술가가 뛰어난 예술가일까? 이건 현대 미술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연주 실력이 뛰어난 건 음악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클래식 연주자들은 이미 잘 알려진 오래된 곡을 연주하기 때문에 그 곡의 다른 연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연주와 비교해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매번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서 연주한다면, 그리고 그 새로운 음악이라는 게—가령 존 케이지의 곡처럼—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다면 어느 연주자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다. 현대 미술에서 '경쟁'이나 '우월'을 이야기하기 힘든 게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미술이 보통 사람들의 이해력으로 이해하기 힘들 만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예술가도 우리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이고, 그들이 만든 작품이 유명해지려면 주위의 동료 예술가의 칭찬과 추천,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는 등 입소문이 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고, 그렇게 이해하는 "써클"이 계속 확장되어 유명해진 것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헝가리관

이 과정을 생각해 보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들은 뛰어난 흥행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의 작품은 이미 많은 평론가와 관객을 감동시킨 인기작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왜 사람들이 이들의 작품을 좋아했을까? 를 생각해 보면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흥행의 관점에서 작품을 접근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작가와 주최 측에서 그걸 의식하기 시작할 때 그렇다.


'베니스에서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