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역설
• 댓글 남기기미국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선거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나라로 악명이 높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는 우리 돈으로 10조 원은 쉽게 넘긴다. 전체 비용은 물론이고, 유권자 한 명당 들어가는 비용을 비교해도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영국, 독일의 40배) 세계 1위다. 왜일까? 이를 살펴 보면 미국의 정치가 구조적으로 변하기 힘든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많은 유권자가 트럼프라는 극단적인 후보를 선택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단 선거 운동 기간이 아주 길다는 게 문제다. 작년에 영국으로 이사해서 영국의 선거 과정을 목격한 어느 미국인의 말은 미국의 선거가 다른 나라들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요약해 준다. 그는 영국에서는 후보들의 TV 홍보가 없었고, 승리한 당은 바로 다음 날 권력을 넘겨받는 걸 보고 놀랐다. (참고로, 미국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까지 두 달 반이 걸린다.) 하지만 선거 기간이 그렇게 짧으니 좋더라며, 그걸 보면서 "미국의 선거가 얼마나 괴상한 건지"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간이 모든 걸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미국의 선거 기간은 근래 들어 더 길어지지 않았지만, 선거비용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2016년에는 140~18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9~25조 원을 썼고, 이번 선거에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물론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더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부와 관련한 미국인의 태도도 중요하다. 저 많은 돈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거다. 지난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이 기부받은 돈은 각각 170억 원, 35억 원에 불과하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는 정치인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문화가 없다. 정치인에게 돈을 준다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이익을 노리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다르다. 미국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네가 하는 말에 돈을 걸라 (Put your money where your mouth is)"는 거다. 돈을 걸지 않고 하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의미고, 말로만 응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후보가 된 후로 초기에 바람을 일으킨 카멀라 해리스는 1분마다 9,000달러를 모금했다고 한다. 공화당의 경우 출마하는 후보가 최소 몇 명에게서 후원금을 받아야 한다고 정해두기까지 했다.
후원금의 대부분은 미디어 홍보에 사용되지만, 기부받은 돈의 액수 자체가 일종의 홍보가 된다. 한국에서 유명한 연예인을 광고에 등장시키는 제품은 일단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홍보비를 많이 쓸 수 있는 후보는 일단 믿을 수 있다는 태도가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특정 후보에게 돈을 줄 때는 (많은 경우) 일종의 투자, 혹은 보험이기 때문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후보가 아무래도 더 많은 기부금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홍보의 역설
정치인의 홍보 비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원칙적으로 말하면 유권자들에게 후보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지지 후보의 결정에 도움이 되거나, 최소한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한 매체에서 뉴욕 유권자들을 인터뷰한 흥미로운 영상(아래)이 있다. 기자는 하원의원에는 민주당에서도 좌파로 분류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OC)를 찍고, 대통령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AOC에 대해서 잘 압니다. 하지만 카멀라 해리스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미국에 살면서 카멀라 해리스를 잘 모른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해리스가 공식적으로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된 건 지난 8월이다. 미국인들은 트럼프에 대해 수십 년 동안 들어왔지만, 해리스는 2020년의 짧은 경선 이후 부통령이 되어 별로 활동이 없다가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대선에 임했다. 하지만 3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니 미국에서도 그 정도면 후보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미국 유권자들이 처한 환경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일단 모든 사람이 뉴스를 열심히 따라가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소셜미디어나 주위에서 이야기하는 걸로 후보에 대한 생각을 결정한다.
바이든이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던 말을 번복하고 선거에 나서게 된 이유가 2022년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대선이 없는 중간선거(주로 의원 및 기타 공직자 선거, 주민투표) 때는 전반적인 투표율이 떨어지고 '정치 고관여층'이 과다 대표되기 때문에 그런 선거의 결과를 보고 2024년에도 민주당이 승리할 거라고 판단한 건 실수였다는 거다. 대통령 선거 때만 투표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을 잘 모르는 저관여층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정당과 후보들이 홍보에 큰 돈을 쓰는 이유는 후보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않는 정치 저관여층에 광고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영상에서 보듯,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광고를 봤다고 해서 반드시 후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정치 홍보의 내용이다. 미국의 정치 홍보 영상은 대부분 상대 후보에 대한 공격이다. 즉, 아무리 많은 광고를 내보내도 대부분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내용이라면 그 광고를 내보내는 후보에 대한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이 해리스를 그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유권자들이 "카멀라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공격하는 트럼프 측의 홍보에 많이 노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트럼프를 공격하는 광고도 같은 효과를 낸다.
결국 후보들이 홍보비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이 쓰지만, 유권자들은 후보에 대한 의구심만 커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확실하게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선거 컨설턴트 조언에 따라 대규모의 모금행사(fundraising)를 진행하고, 고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이 짚어주는 미디어 시장에 홍보비를 집행한다.
후보를 잡는 큰손
미국인들이 아무리 기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났어도 일반 유권자들에게서 10조 원이 넘는 돈을 선거철마다 받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2016년을 기준으로 보면 200달러 미만의 소액을 낸 개인 기부자들이 낸 금액은 약 1/3 정도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200달러 이상 2,700달러(2016년 기준 개인 기부 상한선)를 낸 부자들이 낸 돈이다.
지금은 그 상한선이 3,300달러로 올라갔지만, 부자들은 훨씬 더 많은 돈을 기부할 수 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후보를 지정하지 않고 정당에 기부하면 더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후보와 정당이 함께 모금행사를 기획해서 부자들과 비공개로 함께 만나는 만찬 행사를 개최하면 하룻저녁에 1,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40억 원도 기부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부자들의 정치 후원금과 관련한 혁명적인(?) 사건은 2010년에 일어났다. 연방 대법원이 Citizens United v. FEC(Federal Election Commission, 연방선거위원회)라는 사건에서 기업이나 조직이 선거운동에 사용할 수 있는 액수에 제한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 근거는 헌법의 제1 수정조항, 즉 '발언의 자유'다. 후보 개인에게 기부하는 금액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었지만, 만약 기업이나 개인들이 모여서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하는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운동을 한다면 그건 발언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헌법 원전주의(Originalism, 법 조항의 정신을 해석하는 것을 피하고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적인 해석이었다. 그리고 보수 대법관들의 원전주의적인 해석이 대개 그렇듯,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판결이었다.
대법원이 단체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허락한 이 방법은 선거법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준 셈이다. 후보에게 직접 기부하는 대신 후보를 위해 "발언"하는 단체(Super PAC)를 설립해서 선거운동을 하면 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후보의 선거운동 측과 직접 연락해서 일하면 안 된다는 단서가 있지만, 그걸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고, 확인 할 방법도 없다. 이들 단체가 내보내는 홍보물, 홍보 영상은 그 내용에서 후보의 것과 별 차이도 없다.
그런 큰손의 도움을 받아 당선되면 정치인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여기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가 없다. 버니 샌더스 같은 사람들이 민주당과 공화당 정치인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이유가 이거다. 부자들의 돈을 받고 있으니 노동자를 위한 진정한 개혁을 피하고 부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치를 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내면서 쌓인 경제적 하위 60%의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도달하자 트럼프가 나타나 그 분노를 활용해서 민주당과 전통 공화당 세력을 이긴 것이다.)
일반 유권자가 받는 피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거에 투여되는 금액의 상한선이 사실상 없어지자, 후보들은 후원금 모으기 군수 경쟁(arms race)에 돌입했고, 그 결과 의원들은 임기 내내 하루 4시간씩 전화를 붙들고 다음 선거를 위한 기부금 모금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Daily Catch 뉴스레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의 의원들은 텔레마케터로 전락했고, 그들이 모금에 쓰는 시간만큼 의정 활동이 줄어든다.
남은 시간도 일반 유권자들을 위해 일할까, 아니면 큰손 기부자를 위해 일할까?
고래가 죽으면
미국의 선거 비용을 설명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하나 언급한다. (논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고, 이를 자세하게 소개한 다른 기사는 여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 연구는 지난 8번의 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1,000명의 기부자를 추적했는데, 그런 큰손 기부자가 세상을 떠나면 그가 후원해 온 정치인의 당선 가능성이 3% 이상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손 기부자의 죽음이 가져오는 효과는 더 있다. 큰손 기부자가 사망한 후 정치인의 활동을 보면 기부자가 원하는 정책에 덜 집중하고, 더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은 큰손 기부자가 사망하면 후원을 받던 의원의 이념적 좌표값와 그 의원이 속한 당 정치인들의 이념적 좌표의 중위값 사이의 거리가 감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 큰손 기부자를 가진 정치인은 평균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연구가 큰손 기부자의 죽음 이후를 관찰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는 그 영향력을 확인하기 힘들만큼 금권정치가 일상이 되어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선거비용은 발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증가했지만, 발언의 자유를 억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