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개신교의 탄생 ③
• 댓글 남기기미국이 건국한 직후부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의 기독교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독립할 때만 해도 미국은 동부에 있는 13개 식민지(첫 13개 주가 된다)로 구성된 작고 남북으로 긴 나라에 불과했다. 그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는 영국에서 유래한 장로교(Presbyterian church)가 주류 기독교였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가 태어난 교구를 관장하는 교회에 출석하며 살았다.
상황은 미국이 서쪽으로 영토 확장을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대륙의 원주민, 중서부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인, 그리고 서부에 살고 있던 멕시코인들에게서 땅을 사거나 빼앗으면서 미국의 영토가 빠르게 넓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최전방으로 먼저 이동하는 사람들은 모험심이 강하거나, 새로운 개척지에서 기회를 노리는 젊은 남성들이 많았다.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술집과 성매매, 총싸움 장면은 허구라고 해도 당시 동부 사람들이 서부에 대해 가진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죄로 가득한 거친 땅"이었던 거다.
개신교 목사들은 개척지에서 교회도 나가지 않고 (교회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성경도 읽지 않는 (어차피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명감이 생겼다. 이미 철저하게 교구로 짜여진 동부에서 기존 교회에 들어가 목사 생활을 하는 것보다 개척지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보람 있는 일이었다. 서부는 개신교 목사들에게도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개척지 선교는 동부와 다른 새로운 방식을 요구했다. 교회가 없으니 넓은 공터에 사람들을 모아야 했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니 성경을 기초부터 쉽게 말로 설명해야 했다. 신앙적인 배경이나 교회에 다니던 습관 없이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 결단을 통해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려니 딱딱한 교리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래서 생각과 행동을 바꿀만한 감동적인 설교가 필요했다.
이게 미국에서 감리교(Methodist church)와 침례교(Baptist church)가 장로교를 누르고 급속도로 성장한 배경이다. 두 교파 모두 영국에서 출발했지만, 감동적인 설교를 통한 회개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지에서 빠르게 신도를 늘릴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지금도 미국에서는 침례교회, 감리교회의 설교는 장로교회의 설교보다 쉽고 예화가 많다.)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복음주의적 접근 방법은 개인적 결단을 중요시하는 감리교, 침례교와 같은 교파에서 더 크게 환영받은 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가 1861년에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노예를 통해 큰 수익을 내던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865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미국 건국 이후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실험은 그 성공 가능성을 의심받았다.
사회가 절망에 빠지고, 미래가 흔들리자 미국인들은 비로소 존 넬슨 다비의 전천년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불안을 느낀 건 전쟁 때문만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빠르게 공업화되고 있었고, 농업 기반의 사회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가 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개신교를 믿는 영국이나 북유럽 출신만 들어온 게 아니라, 로마 가톨릭을 믿는 남부 유럽 출신들, 그리고 아예 기독교 자체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유입도 증가하고 있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눈에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고, 다비의 전천년설은 미국 개신교도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그의 세계관이 미국 기독교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남부의 복음주의자들
미국의 남북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분노한 남부였다. 남부는 전쟁이 끝난 이후로 북부에 대한 반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 기지 이름에 반란군인 남부연합군 장군들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도, 그들의 동상을 공공장소에 세워두고 있던 것도 그렇다.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 이후로 크게 불붙은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여파로 많은 남부연합군 장군의 동상이 철거되었고, 군 기지 이름도 바뀌었지만, 그런 변화에 불만을 가진 남부 백인들의 분노는 트럼프의 두 번째 당선으로 표출되었다.
그건 미국의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다. 미국 복음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에 관한 책을 쓴 저자 리사 섀런 하퍼(Lisa Sharon Harper)에 따르면 남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노예를 소유했던 과거에 관해 한 번도 회개한 적이 없다. 링컨이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총을 들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 미국에서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보수 개신교'를 의미하고, 보수 개신교가 '공화당/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크리스천'을 의미하게 된 것은 남부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이 크다.
남부 기독교인들만 인종주의자들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의 거의 모든 교단은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백인들이 노예 해방을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려던 것이었지, 흑인을 평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다. 노예해방론자들도 인종주의자였다.
백인 복음주의자라고 해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존 넬슨 다비의 전천년설을 받아들여 "세상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고, 우리는 그걸 막을 수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도 있었다. 전자가 다비의 관점을 따르는 과격한(radical)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적(liberal, 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다. 후자가 세상에 적극 개입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였다면,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말세를 기다리자는 태도였다.
윌리엄 라일리의 싸움
그러다가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인류가 경험한 적 없는 규모의 대량 살상과 파괴를 본 복음주의자들은 존 넬스 다비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믿게 된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종말론이 등장해서 추종자들을 모았지만, 세계 대전은 차원이 다른 "증거"였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다비의 예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 인류는 대혼란기에 들어간 게 분명했고, 곧 예수가 재림할 것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과격한 복음주의자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고, 이들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공격하는 전투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윌리엄 B. 라일리(William Bell Riley, 1861~1947))였다. 미국 남침례교(Southern Baptists)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켄터키주 루이빌에 위치한 남침례교 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라일리는 미국 사회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문제의 핵심은 자유주의(liberalism)에 있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미국과 한국의 보수 개신교의 태도를 형성한 가장 직접적인 근원이 바로 라일리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다.

기독교 근본주의자 라일리를 분노하게 만든 건 20세기 미국 사회의 변화였다. 여성이 자기 권리를 찾아가면서 전통적인 성역할에 변화가 생기고, 미국이 도시화하고, 한 때 신학교로 출발했던 미국의 대학교들이 세속화하면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심리학이 성경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모든 변화가 그에게는 말세의 징조였다.
그렇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윌리엄 라일리는 존 넬슨 다비의 렌즈(전천년설에 기반한 말세론)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지만, 기독교인은 멸망의 길로 가는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비와 달리, 라일리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세속화하는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미네소타주에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Northwestern Bible and Missionary Training School)를 세워 목사와 신학자들을 양성했고, 자기와 생각이 비슷한 근본주의적 목사들과 힘을 합쳤다.
라일리의 근본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는 미국 개신교의 설교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던 시점이기도 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말을 타고 마을을 다니며 부흥회를 열던 목사들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많은 신자들에게 다가갔고, 전통적인 교회 건축을 벗어나 극장과 비슷한 구조의 건물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에이미 셈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 1980~1944)은 강한 쇼맨십과 카리스마로 신도를 모으는 21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목사들의 기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의 영상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교회 중에도 이렇게 드라마틱한 쇼에 가까운 미국식 설교 방식을 흉내내는 목사들이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교회가 미국 교회의 신학과 방법론을 꾸준히 학습, 수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일리가 기독교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고 가장 증오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그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점점 늘어나는 진화론자들과 정면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이 대결은 미국 보수 개신교의 성격을 규정하고, 21세기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보수 개신교의 탄생 ④'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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