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에 한 번씩 하는 미국의 센서스(기억하기 쉽게 2000, 2010, 2020년.. 이렇게 실시한다)에는 인종에 대한 질문이 들어간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항목인데,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이 센서스 질문지에 정성껏 답하면서 갸우뚱했던 부분이 하나 있다. 아래 왼쪽의 질문이다. (오른쪽은 개선안)

내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왼쪽 (기존) 질문지에서 히스패닉, 라티노, 스패니쉬를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해서 묻느냐는 거였다. 뒤에 이어지는 9번을 보면 '인종(race)'를 묻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인종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시안, 흑인, 백인.. 과 같은 피부색 위주의 큰 분류가 아니라, 한국계와 중국계, 일본계를 구분하는 정도의 세밀한 분류다. 그렇게 자세하게 물을 거라면 8번 항목은 왜 굳이 따로 떼어서 묻느냐는 게 나의 궁금증이었다. 오른쪽 개선안에서는 이 둘을 합쳐서 묻고 있으니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의 기존 센서스 질문(왼쪽)과 개선안 

그렇다면 과거에는 왜 히스패닉, 라티노, 스패니쉬를 별도로 떼어서 질문했을까? 그 힌트는 개선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있다. 왼쪽의 8, 9번을 합쳐서 만든 오른쪽의 8번 질문은 'race or origin'을 묻는다. 즉, 인종과 기원(origin)을 섞어두었다는 거다. 여기에 등장하는 origin이라는 단어는 다소 모호하게 들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을 분류하는 건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종(人種)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종류'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종'은 피부색에 따른 분류인데, 인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 알고 있는 race는 (위에서 본 것처럼) 때로는 매우 세분화된다. 만약 위의 질문지처럼 같은 동아시아인들끼리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서로 다른 '인종'으로 구분한다면 인종이라는 게 얼마나 다양한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영어에서도 가장 흔한 race 구분은 백인, 흑인, 아시아계 같은 피부색 구분이다. 따라서 위의 질문지에 나오는 race는 '민족'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흔히 '남미계'라고 번역하는 (이건 좋은 번역이 아니다. 멕시코는 북미에 있는 나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구사하면 남미계라고 부르기 때문) '히스패닉, 라티노, 스패니쉬'는 어떨까? 이 집단은 피부색으로 구분하면 백인부터 흑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인종으로 분류하는 건, 미국인을 하나의 인종으로 취급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

따라서 이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ethnicity에 해당한다. 이 단어는 흔히 '민족성'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혈통/유전에 근거한 분류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 번역의 방점은 민족'성'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race는 '외모로 드러나는 특징과 어느 정도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한 집단'을 가리키고, ethnicity는 문화, 전통, 가족의 유대 등을 공유하는 집단으로부터 습득된 특징을 가리킨다.

위의 왼쪽 설문지 8번 문항이 묻는 건, '당신이 히스패닉, 라티노, 스패니쉬'로 분류되는 사람이라면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등의 문화권에서 어디에 해당하느냐'는 거다. 즉, 신체적으로 타고난 특징이 아닌, 어떤 문화에서 자라났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쿠바계라고 답한 사람들 중에는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다. 즉, 멕시코부터 시작해서 남쪽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혈통, 피부색에 따른 민족(race)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민족성(ethnicity)으로 구분하는 것이 센서스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드 애틀랜틱

흔히 '영어'라고 하면 영국식 영어(British English)와 미국식 영어(American English)로 구분하지만, 이 두 그룹 아래는 아주 다양한 억양서로 다른 어휘를 사용하는 하위 그룹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방송인들이 '표준 발음'이라는 걸 사용하듯 영어에서도 방송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액센트가 존재했다. 바로 '미드 애틀랜틱(Mid-Atlantic) 억양'라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방송용 억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미드 애틀랜틱은 미국 중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서양 한가운데"를 의미한다. 물론 대서양 한가운데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지역 억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 억양의 정체는 뭐고, 왜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었을까?

20세기 초중반에 녹음된 방송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미드 애틀랜틱 억양을 (20세기 미국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윌리엄 F. 버클리가 이 억양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들어볼 수 있다) 두고 '미국인의 열등감을 보여주는 억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이 억양은 미국인이 영국식 억양을 흉내 낸 억양이기 때문이다. 영국식을 흉내 냈는데, 정작 영국식 억양은 아니기 때문에 대서양을 건너다 만 억양이라고 해서 '미드 애틀랜틱 억양'으로 불리는 것.

하지만 이 억양은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한 지적 열등감을 극복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20세기 후반에는 미국 중서부(Mid-West) 억양을 표준 억양/발음으로 생각하고 방송에서도 이 억양이 보편화되었다.

코드 스위치

미국 중서부 억양이 표준이 되었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중서부 백인의 억양이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만약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백인 아이와 흑인 아이가 방송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면 백인 아이는 자신이 자라면서 하던 억양을 그대로 사용하면 되지만 흑인 아이는 새로운 억양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어느 흑인 리포터가 백인의 억양으로 녹화를 하다가 입에 벌레가 들어가는 순간에 "흑인의 억양"으로 바뀐다고 해서 유명해진 영상이다. 물론 욕설이 들어가서 웃음을 자아내지만 영상 초반에 사용한 억양과 중반 이후에 사용한 억양을 비교해보면 이 사람은 리포터라는 직업을 위해 이 억양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가 서울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순간 사투리, 지역 억양이 살아난다는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로 이동하면서 말투나 행동이 바뀌는 것을 '코드 스위치(code switch)'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방송인들만이 아니다. 미국에는 흑인의 문화적인 특징을 무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흑인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름(first name)을 갖고 있거나, 흑인 특유의 억양을 구사하면 화이트칼라 직업인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따라서 흑인들은 이런 편견을 뚫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백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익히는 일이 흔하다. 즉, 직장용 말투가 따로 존재하고, 집에서 혹은 친한 친구들과 사용하는 말투가 따로 있는 셈이다. 또한 이런 편견 때문에 유색인종의 부모들은 아이의 이름을 백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으로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 (이건 백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은 자식에게 영국식 이름을 지어주어 미국 사회에 쉽게 동화되게 했다.)

가령 미국에서 아시아계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메이저 방송국의 앵커로 이름을 날렸던 코니 청(Connie Chung)의 경우, 종유화(宗毓華)라는 중국식 이름을 갖고 있지만 영문 이름(first name)은 콘스탄스(Constance)이고 중국식 이름(Yu-Hwa)은 미들네임으로 숨어있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콘스탄스의 애칭인 코니로 통했다. 이를 Anglicization(영국화, 영어화)라 부른다.

코니 청(Constance "Connie" Yu-Hwa Chung)

피엔 황, 아이샤 라스코

코니 청이 1980년대에 Yu-Hwa Chung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1세기인 지금도 방송에 나오는 아시아계 배우, 코미디언은 Jimmy(O. Yang), Sandra(Oh), Randall(Park), Steven(Yeun), Daniel(Dae Kim) 같은 "백인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일반적인데,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과 함께 미국이 보수로 돌아선 1980년대에 중국 이름으로 메이저 방송의 뉴스를 진행하기는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미국식 억양을 구사하는 중국계 리포터가 중국식 이름을 보이는 Pien(핀)을 그대로 사용해서 자신을 "핀 황(Pien Huang)"으로 소개하는 사례가 생겼다. 물론 NPR(National Public Radio, 미국 공영 라디오)와 같은 진보적인 매체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동아시아계 미국 기자로서는 처음이다. 핀 황이 자신을 소개한 글에 따르면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우리식으로 표현하면 1.5세대)라고 한다.

목소리는 여기에서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약 16초 지점에서 등장한다.

핀 황(Pien Huang) 기자

그뿐 아니다. 흑인 방송인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드러나는 억양을 전혀 바꾸지 않고 방송을 하기도 한다. 이름도 흑인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아이샤(Ayesha, 흑인만 사용하는 이름은 아니며, 엄밀하게는 아랍계 이름이다)를 사용할 뿐 아니라 백인 말투를 따라 하지 않은 강한 억양을 사용하는데, 기사만 전달하는 리포터도 아닌 NPR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위켄드 에디션(Weekend Edition)의 진행자가 된 것이다.

아이샤 라스코는 소위 흑인들의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전통적인 흑인 대학교(HBCU, Historically Black Colleges and Universities)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출신이다. HBCU 학교들은 여성 리더를 길러내기 위해 여자 대학교가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게 미국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주류 백인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으로 여겨진다.

라스코의 목소리는 여기에서 들어볼 수 있다:

아이샤 라스코(Ayesha Rascoe) 앵커

핀 황, 아이샤 라스코 같은 사람들이 주류 방송에 등장하는 것이 반가운 것은 이들이 단순히 인종(race)의 벽을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문화, 혹은 민족성(ethnicity)을 잃지 않고도 방송 전파를 타게 되었기 때문이다.

('Ethnic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