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러쉬코프가 만난 5명의 갑부들만 이상한 계획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테크 부자들 사이에서 "종말의 날"에 대비한 대피소가 인기를 끈 건 제법 오래전부터다. 물론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부자들이니 절도나 납치를 노리는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기 쉬울 것이고, 그래서 비상시 피신할 수 있는 안전한 대피소를 집에 만드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종말의 날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세상과 고립된 채 생존 가능한 성채를 만드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The super-rich ‘preppers’ planning to save themselves from the apocalypse
Tech billionaires are buying up luxurious bunkers to survive a societal collapse they helped create, but like everything they do, it has unintended consequences
억만장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종말의 날 대피소에 관한 기사

러쉬코프는 그의 책 'Survival of the Richest: Escape Fantasies of the Tech Billionaires (부자 생존: 테크 억만장자들의 탈출 환상)'에서 유독 테크 업계의 갑부들이 종말의 날 시나리오에 집착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이들이 팔고 있는 테크놀로지가 결국 대피소 만들기와 같은 사고 방식에 기반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료 연구자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 오터레터에서 소개한 '플랫폼은 왜 모두 💩이 될까?'라는 글은 닥터로우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가 어느 글에서 했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엡손(Epson) 프린터 중에는 일정 숫자의 페이지를 인쇄하고 나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들이 있습니다. 고장 여부와 무관하게 그냥 작동이 멈추도록 설계된 겁니다. 회사에서 밝힌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쇄 중에 잉크 방울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걸 잡아주는 작은 스펀지가 프린터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데, 그 스펀지가 감당할 용량이 넘치면 안 되니까 작동을 멈추게 했다는 거예요.

당연한 얘기지만, 더 좋은 해결책은 그 문제의 스펀지를 교체하는 겁니다. 하지만 기업은 몇 푼 안하는 스펀지를 바꿀 수 있게 설계하는 대신 (스펀지 문제 외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프린터를 강제로 정지시켜 소비자가 새로운 제품을 사게 합니다. 그 결과로 버려지는 멀쩡한 프린터는 브라질 어딘가에 쌓이고, 아이들이 거기에서 재활용할 부품을 골라내겠죠.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프린터를 만들기 위해 아프리카, 호주 같은 곳에서 땅을 파서 광물을 캐내야 합니다.

프린터 회사에서 그 결정을 내린 사람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사람은 새로운 프린터를 팔아서 벌어들인 이득으로 자기가 내린 결정 때문에 벌어질 현실(환경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는 이걸 '차단 방정식(insulation equ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말하자면, 내 차가 얼마나 빨리 달려야 내 차가 뿜어내는 매연을 내가 마시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느냐는 계산입니다. 많은 기업인이 그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빨리 돈을 벌어야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저지른 해악으로부터 나를 분리, 차단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거죠."

그런데 러쉬코프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면서 자기도, 자기 이웃도 똑같은 사고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두려워 밖에 나가지 못하니 아마존 프라임(한국의 쿠팡 와우와 비슷한 서비스) 멤버십을 갖고, 프레쉬디렉트(마켓 컬리)로 식료품을 주문하고, 도어대시(배달의민족)로 음식을 배달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단다. 당시 사람들은 배달원과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들이 놓고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물건을 들여온 후 소독제를 뿌리는 생활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대피소를 만드는 갑부들처럼 요새 속에 숨어서 위험한 세상과 격리되어 안도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러쉬코프는 우리가 사용해 온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배달 후 확인 사진을 찍는 아마존 배달원 (이미지 출처: YouTube)

티모시 리어리

더글러스 러쉬코프는 자기가 젊은 시절 따르던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의 교훈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잠깐, 티모시 리어리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티모시 리어리는 환각제 사용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마약 사용자가 아니라 LSD 같은 환각제가 인간 정신의 잠재력을 열어준다고 믿고 이를 연구했던 하버드 대학교의 임상심리학자다. 히피 운동이 크게 일었던 1960년대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후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감옥 생활을 했다.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스티브 잡스를 비롯해 1960, 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테크업계의 거물들이 환각제 사용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어봤을 거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환각제와 분리하기 힘들다. 환각제가 틀에 박힌 사고를 벗어나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는 믿음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다. (한때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처럼 여겨졌던 버닝맨 페스티벌 자체가 환각제 없이 존재하기 힘든 행사다.) 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 티모시 리어리의 사상이 있다.  
티모시 리어리 (이미지 출처: The Woodstock Whisperer)

티모시 리어리는 1980년대, 러쉬코프가 청중으로 참여한 어느 모임에서 스튜어트 브랜드(Stuart Brand)가 쓴 '미디어랩(The Media Lab)'이라는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스티브 잡스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홀어스캐털로그(Whole Earth Catalogue)를 만든 사람이고, 그가 쓴 미디어랩은 우리가 아는 MIT 미디어랩에 관한 내용이다. 미디어랩은 당시 디지털 테크놀로지 개발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러쉬코프에 따르면 리어리는 그날 오후 내내 그 책에서 중요한 부분에 사인펜으로 표시하면서 소리내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리어리가 갑자기 구역질이 난다는 표정으로 책을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여성은 3%도 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지금이야 젠더 다양성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는 미국에서도—남자들은—그걸 문제로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만큼 리어리가 앞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더 흥미로운 건 그다음에 한 말이었단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자궁을 인공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심리학자였던 리어리는 그 책에 등장하는 엔지니어들은 엄마가 자기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감싸고 보호해 줄 테크놀로지, 자기가 필요한 모든 걸 해주는 엄마 같은 테크놀로지를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인간, 진짜 여성처럼 모호하고 알기 힘든 존재와 분리, 차단되어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의 오큘러스 발표 (이미지 출처: Vox)

많은 테크 갑부들이 대학을 마치지 않고 테크 업계에 들어와서 벤처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받아 기업을 만들었다. (피터 틸 같은 부자들은 대학생이 중퇴해야만 큰돈을 투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런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을 하지 않고 바로 기업을 만들거나 입사해 테크 버블 안에 살면서 특정한 사고 방식(mindset)을 갖게 된다는 게 러쉬코프의 주장이다.

그 사고 방식의 핵심은 "문제는 인간이고, 그 문제의 해결책은 테크놀로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실리콘밸리가 인터넷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던 1980년대~1990년대 초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다. 러쉬코프가 속했던 사이버펑크 운동을 비롯해 당시 실리콘밸리에서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일상적인 틀에서 상상하기 힘든 창의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이 실리콘밸리의 테크놀로지를 발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현실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든 '인간'을 좀 더 '예측 가능한 소비자'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때부터 실리콘밸리는 기계를 이용하는 대신 사람을 이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게 러쉬코프의 생각이다. 인간은 위험하고, 문제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과 거리를 두고 차단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실리콘밸리 테크 부자들에게 존재한다.

탈출 환상은 바로 이런 사고 방식에서 출발했다.

피터 틸의 책, '제로 투 원' (이미지 출처: TrueUp)

한국의 스타트업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피터 틸(Peter Thiel)의 책 '제로 투 원'도 러쉬코프가 보기에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 책에서 틸은 경쟁하지 말고, 남들이 전부 경쟁할 때 그들보다 한 차원 위에 존재하라고 주장한다. 틸이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을 뒤틀어서 말하고 있다는 러쉬코프가 보기에는 마크 저커버그도 다르지 않다. 페이스북이 궁지에 처하자 아예 회사 이름까지 메타(Meta)로 바꾸고 다른 차원에 있겠다고 했다는 거다. 물론 그의 메타버스 꿈은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지만, 비슷한 얘기를 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팬데믹 때 일었던 웹3.0 열풍을 기억하는가?)

월스트리트도 다르지 않다. 주식 시장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팔고 사는 시장을 추상화(abstraction)한 것이다. 실제 기업이 물건을 얼마나 잘 팔고 있느냐와 주식의 가치는 정비례하지 않는 이유가 그거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은 그렇게 기업가치에 대한 전망을 팔고 사는 주식의 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리기도 싫어서 그걸 또 추상화한 파생금융상품(derivatives)을 만들어 냈고, 심지어 파생상품의 파생상품도 나왔다.

파생상품시장이 디지털 시대에 점점 커지면서 주식시장의 크기를 넘어섰고, 2013년에는 파생상품 거래소가 뉴욕주식거래소(NYSE)를 사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인간의 필요를 이미 추상화한 주식시장인데, 그걸 또 추상화해서 거래하는 시장은 현실에서 또 한 차원 멀어진 것이다. 부자들은 이렇게 현실에서 계속 멀어지고 싶어 한다. 다른 인간들이 사는 현실은 복잡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서 탈출을 꿈꾼다.


마지막 편 '탈출 환상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