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교통사고에 이어 아내와 이혼해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빈스 길머는 일주일에 3, 4일을 술을 마셨다. 병원 밖에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지만, 클리닉에 출근해서는 정상적인 진료 업무를 이어가던 빈스는 2004년 6월 28일, 하루를 휴진하겠다고 했다. 클리닉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정신병원에서 아버지 달튼 길머(Dalton Gilmer)를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다.

빈스의 아버지 달튼이 어떤 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개된 법원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혼자서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지 못했고, 때로는 식사도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항정신병제(antipsychotic medicine)를 복용하고 있었다. 60세였지만 걷는 것도 힘들어,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를 정신병원에서 퇴원시켜 자기가 일하는 클리닉에서 가까운 양로원(nursing home)에 모시기로 한 빈스는 그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도착해서 퇴원 수속을 밟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자기 트럭에 태우고 양로원으로 향하지 않고, 몇 시간 떨어진 어느 호수에 갔다. 나중에 법정에서 한 진술에 따르면, 그 호수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호수였기 때문에 양로원에 가기 전에 한번 들르고 싶었던 곳이라고 했다. 빈스는 아버지에게 가면서 트럭에 커다란 카약을 싣고 가기는 했지만, 걷기도 힘든 아버지를 카약에 태운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고, 늦은 저녁에 카약을 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빈스는 그날 트럭에서 아버지를 살해했다.

빈스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자기와 여동생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빈스가 6살, 동생이 3살 때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빈스의 말을 들은 기자는 자기가 들어본 가장 끔찍한 성폭력이었다고 했다. 여동생도 빈스의 주장에 동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빈스의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했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했다. (빈스의 어머니는 남편이 아이들에게 그런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얘기를 전혀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싸우고 돌아온 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종종 폭력을 휘두른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정신병원에서 돌아오던 날, 빈스의 아버지는 트럭 옆자리에 앉아 옛날처럼 부적절한 성적 농담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빈스의 몸을 더듬었다는 게 빈스의 주장이다. 빈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트럭에 있던 밧줄로 아버지의 목을 감고 조였다. 그는 마치 강박증처럼 머릿속에서 "죽여, 죽여!"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죽인 빈스는 시신을 트럭 짐칸으로 옮겼다. 이제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북쪽으로 몇 시간을 달린 빈스는 버지니아주와 테네시주의 경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빈스는 시신에서 손가락 10개를 모두 잘라냈다. 시신의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침 트럭에 집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작은 톱이 있어서 그걸 사용했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하지만 빈스의 계획과 달리 아버지의 시신은 몇 시간 만에 발견되었고, 경찰이 신원이 확인되는데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입고 있던 바지와 폴로 셔츠 안쪽에 "D. Gilmer"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옷에 이름을 찍는 건 애초에 빈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세탁물이 섞이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알게 된 벤저민은 빈스의 성격이 돌변한 이유를 설명할 만한 가설을 세워 봤다. 벤저민은 의대에 진학하기 전에 대학원에서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ies)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빈스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것이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보였다. 어쩌면 빈스는 유전적인 정신병 요인을 갖고 있었는데, 머리를 다치면서 신경학적 후유증(neurologic sequelae)으로 그게 발현된 것일 수도 있었다. 사고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고, 그 이후부터 태도가 돌변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에 보인 빈스의 행동이었다. 살인 바로 다음 날 클리닉에 출근한 빈스는 직원들에게 "아버지를 집에 모셔 왔는데, 아버지가 혼자 집 밖으로 나가서 보이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했다. 그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며 그날의 진료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직원(테리 월리)에 따르면 아버지가 실종되었는데 빈스는 전혀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별일 없이 일을 마친 빈스는 금요일 낮에 클리닉 직원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빈스는 경찰의 전화를 받게 된다.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전화였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테리는 "전화를 받는 빈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빈스는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기절할 듯해 보였기 때문에 함께 있던 직원들이 식당 벤치에 그를 눕혀야 했다.

빈스 길머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기자는 담당 형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마이크 마틴(Mike Martin)이라는 이름의 이 형사는 빈스를 "아버지를 죽이고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던 범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체포 당시 빈스는 침착했고, 경찰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고 한다.

마틴 형사에 따르면 심문 때 빈스는 "집으로 모시고 온 아버지는 저와 함께 있게 된 것을 아주 기뻐하셨고, 뒤뜰에 나가서 프리스비를 던지며 개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형사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걷지도 못하는 빈스의 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사가 자기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빈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상대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의사야. 그것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존경받는 의사. 당신 잘못하다간 직장을 잃는 수가 있어."  

빈스의 위협에 형사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 제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조사 결과를 주 검찰에 보고할 것이고, 살인 혐의로 체포영장을 받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형사가 체포영장을 들고 빈스의 집을 찾았을 때 빈스는 캠핑 장비를 챙겨 도주해 숨었지만, 경찰은 근처 숲에 숨어있던 그를 어렵지 않게 찾아 체포할 수 있었다.

기자는 빈스의 살인이 계획된 범행으로 보였냐고 물었다. 형사는 그렇다고 했다. 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오랜 폭력으로 인한 분노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아버지를 죽인 것이었지만, 형사는 계획된 범행이 확실하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사람이 (범행에 사용할) 장갑과 밧줄을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트럭에 톱을 준비하지도 않고요."

빈스의 사건을 재구성하던 벤저민은 직원인 테리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빈스는 아버지의 입원비를 아버지가 가진 돈으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입원비를 내지 않아서 정신병원에 내야 할 돈이 무려 24만 달러(약 3억 7,600만 원)에 달했다고 했다. 게다가 빈스는 아버지를 살해한 시점에 알래스카로 2주 동안 휴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테리에게 "빈스의 알래스카행 비행기표가 편도였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테리는 자기가 예매를 해줬기 때문에 왕복표였다고 반박했지만, 경찰은 빈스가 나중에 왕복표를 편도로 바꾼 기록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빈스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거다.

이 모든 얘기를 들은 벤저민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스는 그냥 아버지를 죽인 냉혈한이었는데, 그걸 정신병으로 포장했을 뿐인 것 같았다. 충동적인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는다. 계획은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다.

경찰에 체포된 빈스는 자기가 세로토닌(serotonin) 결핍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로토닌은 호르몬의 일종으로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이다. 세로토닌이 부족할 경우 기분(mood)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많은 우울증 치료제가 세로토닌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 치료제를 전문용어로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라고 부르는데, 이를 복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약을 중단하면 자살 충동이나 극도의 초조함을 느끼고, 정신병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빈스의 범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결국 SSRI 약물을 중단하는 것이 따뜻하고 좋은 의사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행동을 할 만큼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빈스에 따르면 그는 여러 해 동안 불안증에 시달렸다. 실제로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SSRI 약물인 렉사프로(Lexapro)를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데려오기 하루, 이틀 전에 복용을 중단했다는 게 빈스의 주장이다. 그 약을 끊으려면 서서히 줄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곧바로 중단했다는 것이다.

빈스가 감옥에서 한 의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 약을 중단한 직후로 "극도로 초조해졌고, 머릿속에서 목소리(환청)가 들렸다." 그는 렉사프로를 끊으면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고 주장했다. "그 목소리는 (점잖게) 제안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당장 어떤 행동을 하라고 강요하는 목소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방 안을 계속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진다.


'닥터 길머의 수수께끼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