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 난 카세트테이프 ②
• 댓글 남기기다코우(打口) 테이프는 단순히 깨지거나 흠집이 난 카세트테이프가 아니라, 일부러 흠집을 낸 카세트테이프였다. 하오팡은 아직 몰랐지만, 그렇게 깨진 테이프는 중국 전역에 확산되려는 참이었고, 곧 수많은 중국인들이 구입하게 될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전 세계에서 재활용 가능한 폐기물을 수입하고 있었다. 선진국에서 플라스틱 폐기물을 중국으로 보내면 이를 분류, 분쇄해서 펠릿(pellet)으로 만들어 재활용하는 업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던 "폐기물" 중에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한 해에 적게는 450만 개, 많게는 1억 5,000만 개의 음악 카세트테이프가 중국에 폐기물로 도착했다. 그런데 이 카세트테이프는 소비자들이 버린 게 아니었다. 요즘 한국에서 인쇄된 일간 신문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로 팔려 가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미국과 유럽의 음반 업계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앨범 하나가 뜨면 300, 400만 개, 심지어는 1천만 개가 넘는 카세트테이프를 팔 수 있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되니 업계에서는 새로운 앨범을 낼 때 몇백만 장을 찍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한 번에 그렇게 많은 테이프를 만드니 공급이 과잉되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앨범이라고 해도 남아도는 테이프가 많았으니,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앨범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레코드 가게들에서는 팔고 남는 카세트테이프를 크게 할인한 가격에 대량으로 처분했고, 그렇게 넘겨진 테이프들은 고속도로 휴게소나 편의점, 세차장 같은 매장에서 싸게 팔렸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팔리지 않는 테이프들은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음악 카세트테이프는 패션 제품과 마찬가지로 폐기한 제품이 다시 시장으로 흘러들어 팔릴 수 있었기 때문에 버릴 때는 전기톱으로 깊숙한 흠집을 내는 게 관행이었다. 케이스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음악이 녹음된 테이프까지 깊숙이 잘랐다.
흠집을 낸 카세트테이프는 컨테이너에 실려 중국으로 갔다. 펭 레이 교수에 따르면 이런 관행이 시작된 것은 1992년이었고, 카세트테이프만이 아니라 CD도 같은 방식으로 흠집을 낸 채 중국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몰려 오는 카세트테이프를 본 중국인들 중에 예라오시(Ye Lao Shi)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라오시는 광둥성에 있는 산터우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던 사람인데, 산터우는 미국과 유럽에서 보낸 음반 폐기물이 도착하는 주요 항구 중 하나였다. 그는 항구 근처에 있는 재활용 폐기물 처리장에 흥미로운 물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 창고에 갔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카세트테이프를 보게 되었다.
예라오시는 폐기된 테이프와 CD가 완전히 망가진 게 아니었고, 깨지고 끊어진 부분만 고치면 얼마든지 다시 복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CD는 가장자리, 그러니까 음반의 시작 부분만 문제가 있을 뿐 나머지는 재생이 가능했고, 테이프의 경우 풀어내서 끊어진 곳을 붙인 후 새로운 카세트에 옮겨 감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값싸고 솜씨 좋은 노동력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예라오시는 사람들을 고용해 카세트테이프를 복원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렇게 복원된 테이프는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암시장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92년쯤에는 전국에서 복원된 다코우 카세트테이프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오팡이 우연히 발견한 카세트테이프 가게가 그런 판매망의 일부였던 거다.
하오팡은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들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지금은 음악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를 회상하며 다코우 테이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를 전하는 라디오랩은 방송 마지막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준다. 하오팡처럼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로 서구 대중음악을 접한 리양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리양이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로 가장 처음 접했던 미국 밴드 중 하나가 너바나(Nirvana)였다. 워낙 전설적인 록밴드라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1990년대 초 리양은 너바나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그게 무슨 장르인지도 몰랐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듣는 서양 대중음악에 장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듣는 음악 장르는 그저 중국의 대중음악과 서양의 대중음악, 두 개의 장르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때까지 서양의 대중음악은 중국 내에서 불법이었으니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는데,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서로 다른 시기와 장르가 뒤섞여서 한꺼번에 중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은 어느 가수, 어느 밴드가 먼저 나왔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20세기 대중음악 장르의 발전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해보자. 르네상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곳이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이다. 여기에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 죠토(Giotto)의 작품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런데 아래 이미지에서 죠토의 작품 속 인물들은 르네상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뻣뻣하고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그 시기 회화의 발전 과정을 짧게라도 배우면 죠토의 그림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죠토 이전의 회화를 알고, 죠토 이후에 등장한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를 알면, 죠토가 얼마나 혁명적인 예술가였고, 르네상스 회화사에서 핵심적인 고리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지난 여름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 중 하나가 죠토의 벽화를 직접 봤을 때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니 화가의 고민과 천재성이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대중음악도 다르지 않다. AC/DC가 나오기 전에 비틀즈가 나왔고, 너바나는 AC/DC 이후에 등장한 것은 중요하다. 척 베리(Chuck Berry)의 음악은 비틀즈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비틀즈가 얼마나 척 베리를 존경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고 들으면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런 모든 발전사를 전혀 모른 채 1990년대에 한꺼번에 모든 장르를 뒤죽박죽 접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가 아는 유명한 뮤지션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비틀즈와 밥 딜런의 사운드를 싫어했다고 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핀란드의 메탈 밴드들의 음악은 큰 인기였다. 음악을 맥락이 없이 들은 결과, 완전히 다른 인기 순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음악을 들으며 뮤지션이 된 사람들의 음악도 다르지 않았다. 가령 리양이 이끄는 밴드는 펑크록을 지향하는데, 정작 밴드 멤버는 헤비메탈 밴드인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셔츠를 입고 있는 식이다. 펑크록과 헤비메탈은 연주방법과 지향하는 지점이 완전히 다른데, 이들은 그 둘 사이에—서구의 음악팬들이 느끼는 것처럼—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다.
대중음악 평론가에 따르면 실제로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 두 장르가 묘하게 섞여있다고 한다. 1970년대 미국의 펑크록과 1980년대 영국의 메탈이 만난 것 같은데, 그 결과로 나온 곡은 의외로 좋다는 게 평론가의 결론이다.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는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공산주의 독재국가의 철저한 검열과 자본주의의 병폐인 과잉 생산과 자원 낭비가 만난 결과였다. 하지만 그 결과, 팝의 원산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존의 문화적 맥락의 지배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결과가 탄생할 수 있었다. 다코우 카세트테이프는 문화의 다양성과 혼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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