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역사가 꽤 오래된 어느 농인(聾人) 단체에서 책을 출간하는 일을 돕게 되었다. (농인은 청각장애인을 부르는 다른 말로, 특히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 단체에서는 미국에서 농인들을 교육하는 유명한 대학교에서 출간하는 책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번역 판권을 얻어내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받은 거다. 일은 잘 이뤄졌고, 몇 권이 번역되었다. 나중에 한국에 갔을 때 단체를 이끌고 계신 분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셔서 함께 밥을 먹었다.

말 그대로 우연한 기회에 약간의 도움을 드렸을 뿐, 나는 청각장애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런데 본인도 청각장애가 없고, 가족 중에 청각장애인이 없는데도 농인 단체를 설립해서 평생을 애쓰신 분과 식사하게 되었으니 이참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평소 궁금했던 걸 여쭤보기로 했다. 정말로 무식한 질문이었지만,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갖고 계신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고백처럼 적어 보면...

"청각장애인을 도우려면 TV에서 자막 방송을 내보내는 게 더 낫지 않나요? 꼭 수어 통역사가 화면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식탁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이사장님의 얼굴에는 침통함 비슷한 표정이 스쳤다. "박상현 선생님 같은 분도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실 만큼 농인과 수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과거에 수화(手話)라고 배운 것을 지금은 수어(手語)라고 고쳐 부르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그분의 설명은 이랬다.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타고난 청각장애인인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말을 배울 기회가 극히 제한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타고난 청각장애인에게 비장애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외국어다. 한국에서 태어난 농인에게 한국어가 얼마나 어려운 언어인지를 상상해 보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제2외국어를 생각해 보면 된다.

학생 때 잠깐 배운 제2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그걸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에게 자국어가 그런 언어다. 아니, 그것보다 더 어렵다는 게 이사장님의 설명이었다. 고등학교 때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배웠던 사람은 최소한 그 언어가 어떻게 들리는지 안다. 그런데 발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말소리를 듣지 않고 특정 언어가 만들어지는 규칙(syntax)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국어는 아무리 열심히 익혀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 "청각장애인과 필담(筆談)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그분들과 카톡을 해보시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제가 보여드리면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모국어가 바로 수어다. 수화(手話)라고 하지 않고, 수어(手語)라고 하는 이유는 그게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

서두가 길었지만, 사실 이 글은 청각장애가 아닌, 시각장애와 관련한 글이다. 이 둘은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장애이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농인과 수어에 관해 설명을 듣다가 그분의 말씀에서 시각장애인 단체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이 묻어나는 걸 느꼈다. "시각장애는 비장애인 눈에 쉽게 띄지만 청각장애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사회적으로 청각장애를 다른 장애에 비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야말로 '사지 멀쩡하겠다, 앞도 잘 보이는데 뭐 그리 힘드냐'는 겁니다. 농인들은 우리 중에 사는 외국인인 걸 몰라요. 그래서 지원도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 앤드루 릴런드(Andrew Leland)가 쓴 책,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를 읽어 보면 거꾸로 농인 단체의 단결력을 부러워하는 감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 수어(ASL)라는 자기들만의 언어로 분명한 문화를 공유하고 뭉치는 이들에 비해 시각장애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의 저자 앤드루 릴런드 (이미지 출처: The Boston Globe)

하지만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와 시각장애인 커뮤니티의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비장애인들과 다른 세상에 산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세상"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전자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이라면, 후자는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아도 감각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존재한다. 이 책의 원제, The Country of the Blind (시각장애인들의 나라)가 바로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연히 시각장애에 관한 책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장애인의 문제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시각장애를 넘어서 '본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자체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경험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앤드루 릴랜드의 이야기에서 많은 걸 배울 거라고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시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이 아니라, 서서히 실명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이 책의 전반부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만, 앤드루 릴랜드는 십 대 시절에 망막색소변선증(retinitis pigmentosa)이라는 진단을 받고 꾸준히 시력 감소를 겪다가 지금은 법적 시각장애인(legally blind)이 된 사람이다. 병명은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증상이다. (그는 "두루마리 휴지심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시각장애를 유발하는 병은 다양하지만, 시각장애는 결국 둘 중 하나라고 한다. 피사체가 희미하게 보여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것과 릴랜드의 경우처럼 시야가 점점 좁아져서 결국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에게 해줄 얘기가 많다. 양쪽의 세상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장애를 갖기 전에 비장애인들이 시각장애에 관해 알고 있는 잘못된 지식과 오해를 잘 이해하고 있고, 그걸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가 서서히 시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어도 사고 등으로 일시에 잃는 사람들이 있지만, 릴랜드의 경우 20년 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잃고 있기 때문에 (그는 밖에 다닐 때는 흰 지팡이를 사용해야 하지만, 아직도 눈앞에 있는 물체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 '본다' 혹은 '보지 못한다'는 복잡하고 정의하기 힘든 개념을 누구보다 많이 생각해 왔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어둠 속에" 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릴랜드에 따르면 실제로 그렇게 완전히 볼 수 없는 사람은 전체 법적 시각장애인의 15%에 불과하다. 나머지 85%는 희미한 빛을 인식하는 단계부터 코 앞에 있는 아주 큰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단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있지만, 과연 법적 시각장애인만 보는 데 어려움을 느낄까?

저자는 자기의 시야가 점점 좁아져서 결국에는 중심시가 완전히 사라질 것을 안다. (이미지 출처: Birdability)

자신의 황금기가 60~75세였다고 말하는 100세 넘은 고령의 철학자 김형석은 나이가 들면서 눈이 어두워져서 책을 오래 읽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는 시각장애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시력을 잃는다. 내 또래 사람들은 "부모님의 폰을 보면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다"고 웃는다. 내 부모님도 폰의 밝기를 100%로 맞춰 놓으신 듯, 대낮처럼 밝은 폰을 사용하신다. 그럼 내 폰은 어떨까? 나는 실내에서 20~30%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는데, 아이들은 그런 내 폰을 보고 너무 밝다고 놀란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서서히 시력을 잃는 과정에 있다. 다만 앤드루 릴런드는 그 과정을 좀 더 짧고 급격하게 겪을 뿐이다.

1부에서 자신의 시력 손실 과정을 설명한 저자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시력을 잃으면 성적인 욕망에 영향을 받을까? 힘 있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에 익숙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흰지팡이를 든 남성의 남성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남성들은 흰지팡이를 든 여성을 어떻게 다르게 볼까? 시각장애인들은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기기와 프로그램, 정책들을 실제로 어떻게 생각할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텍스트를 음성으로 완벽하게 변환해주는 세상에서 점자는 살아남을까?

이런 의문에 답을 주는 책이지만, 이 책은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다. 이 모든 질문은 자기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고,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 특히 시력을 잃고 장애인이 되어가는 자기를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의 반응을 솔직하게 적는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아마도 미디어의 영향으로—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애인과 결혼한 천사'가 아니다. 릴런드는 청혼하기 전에 자기가 시력을 잃고 있고, 언젠가는 장애인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고, 아내는 그걸 알고 결혼했지만, 남편이 시력을 얼마나 잃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때로는 문자 그대로 그와 부딪히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는 이야기가 독자가 움찔할 만큼 솔직하게 담겨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나쁜 배우자가 아니라, 평범한 배우자일 뿐이다. 결혼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다.

앤드루 릴런드와 그의 아내 릴리 (이미지 출처: Maine Public)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2부 7장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여기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개발된 기술들이 장애인 사용자층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술이 된 사례들이 등장한다. (릴런드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타자기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되었고, 전자책의 표준인 EPUB는 시각장애인 기술자들이 만든 디지털 읽기 포맷에 그 시초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유명해진 개념인 유니버설 디자인, 즉 보편 설계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깊이 들어가는 질문은 장애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다. 다른 장애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장애를 어떻게 보느냐를 두고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특성 중 하나일 뿐, 그 사람을 규정하는 정체성이 아니라는 주장과 시각장애는 싸워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는 주장이다. 가령 후자에 해당하는 '실명과 싸우는 재단(Foundation Fighting Blindness)'의 경우 비장애인들에게 안대를 씌우고 "시각장애인의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행사를 하는데, 많은 시각장애인은 이런 행사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어둡고, 우울하고, 벗어나야 할 곳으로 묘사한다고 비판한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에게 그 세상은 평생 지내야 할 곳이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인데, 순전히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멋대로 비참한 이미지를 사용해 동정심을 유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전국시각장애인연맹(Naitonal Federation of the Blind)'은 실명과 싸우는 재단의 비장애 중심적(ableist) 캠페인에 반대하지만, 릴런드는 이 재단이 실명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려는 장애아동의 부모들이 주축이 된 단체임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런 재단의 노력을 전적으로 비장애 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로라 월크의 청문회 증언

결국 문제는 장애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일 거다. 이건 철학적 질문이지만, 동시에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뱃속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거나, 자라면서 장애를 가질 게 분명하다면, 부모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장애를 이유로 임신 중지(낙태)를 선택하고도 부모가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는 선은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는 9장 '정의의 여신'에 가면 어떤 진보적인 독자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게 심각해진다. 트럼프가 임명해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의 무효화를 끌어낸 에미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대법관의 제자인 로라 월크(Laura Wolk)가 배럿 판사의 대법관 인준 청문회에 나와 그를 지지하는 의견을 밝힌 이유는 가볍지 않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시각장애인이 사는 세상, 비장애인들은 잘 모르는 세상을 설명한다. 하지만 두 개의 세상을 모두 경험한 저자는 두 세상이 영원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두 개의 세계가 이제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겹치는 지대가 더 늘어날 것이다. 궁극적으로 두 세계가 서로에게 영역을 양보하고, 내어주고, 공유해야 할 것이다. 눈먼 자들은 우리의 세계에, 우리도 그들의 세계에 속한다. 그 세계는 하나이므로."

앤드루 릴런드의 이 말은 그저 책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하는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믿는 이유가 책 전체를 통해 충실하게 전달된다. 많은 사람이 들었으면 한다.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독자 열 분께 이 책을 선물하시기로 했어요.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면 12일(토요일)에 당첨자를 발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