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했다. "피라미드, 만리장성부터 아이폰까지, 인류의 위대한 업적들은 전부 노예 노동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피라미드가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논란이 많았고, 과거 만리장성을 쌓았고, 지금은 폭스콘 공장에서 아이폰을 제조하는 중국인들이 정말로 노예였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북 전쟁 이전 미국에서 면화와 담배 재배에 동원된 흑인 노예들처럼 신분적인 노예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노예 노동"이 뭔지 잘 안다.

10년쯤 전의 일이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 내려서 호텔까지 가는 길에 보고 놀랐던 장면이 있다. 화물칸에 사람들을 잔뜩 태운 트럭이 내가 탄 택시 옆을 지나갔다. 짐칸에는 (한국 군용트럭에서 보는 것 같은) 벤치도 없었고, 그냥 바닥에 촘촘히 쭈그려 앉아 있었다. 트럭을 '타고 있다'기보다는 '실려 간다'는 말이 더 적절해 보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가축을 수송할 때나 보는 방식이었는데, 싱가포르 같은 선진국에서 기본적인 안전기준도 없는 걸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아침부터 기온이 금방 올라가는 무더운 그 도시에서 도로를 보수하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부색은 내가 참석한 컨퍼런스가 열리는 호텔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의 피부색과 완전히 달랐다. 동아시아계와 백인들은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고, 인도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야외 노동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리랑카에서도 많은 인력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주로 여성으로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한다.) 그 사람들은 밖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싱가포르 사람들과는 사실상 분리된 삶을 사는 듯했다.

싱가포르의 외국인 노동자들
이미지 출처: Goody Feed

밖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는 없다. 내가 놀랐던 건, 싱가포르에서는 그들이 피부색으로 구분되기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안전기준이 적용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짙은 피부색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옆을 하나같이 밝은 피부색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커피를 들고 지나는 모습은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으로 만든 대체 역사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노예는 아니었지만—중동의 산유국들에서는 외국 노동자들의 여권을 빼앗아 실제로 노예처럼 사용한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다—일반 국민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면 그 노동은 노예 노동에 가까워진다.

한 사회에서 특정 인종이나 국적, 혹은 사회적 약자에 속한 사람들이 그 사회의 주류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런 불평등한 조건을 법에서 차별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 준다면, 그 사회는 원칙적으로 노예 노동에 동의하는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국민의 행복과 복지'를 앞세우는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정훈 의원이 한국의 최저 임금제도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하자고 했을 때 그가 내세운 이유는 "가사도우미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 젊은 청년·부부들"과 "(자녀를 돕느라) 등골이 빠지는 시부모, 친정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차별적 임금을 받는 외국 노동자를 들여와야 한국의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은 조정훈 의원의 머리에 나온 게 아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생각을 하던 오세훈 서울시장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 제도를 도입하면 표를 주겠다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명지대학교 정회옥 교수의 책 '차별의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차별적 노동은 전 세계에 존재하지만, 한국인에게 조정훈, 오세훈 같은 정치인의 주장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책의 부제가 아주 정확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어떻게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는가." (최근 본 책 중에서 이만큼 완벽한 제목과 부제를 가진 책이 있나 싶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 사회의 타자(他者)들—조선족 간병인, 동남아 이주노동자, 배화사건의 중국인들—은 과거 한국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1~3장에서 저자는 외국인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어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함만이 아니다. 독일에 갔던 간호사나 하와이의 농장 노동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었던 사람도 그들이 실제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이 한국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얼마나 흡사했는지 깨닫게 해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4~6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한국의 형제복지원 원생들과 한센병 환자들, 그리고 한국의 여성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설명하면서 유럽의 집시, 미국의 에이즈 감염자, 그리고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와 정서적 거리가 존재하는 사례를 비교하는 것이다. '책을 통해 알고 있는 (남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면?'이는 질문이다.


어쩌면 차별은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일지 모른다. 영국은 산업화를 통해 1700년대 후반에 유럽 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이 되었지만, 그 원료인 면화는 인도, 이집트 등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다. 미국 남부도 면화 생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의 노동자들이 가난한 인도, 이집트의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시 미국의 백인들은 면화 재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뙤약볕에서 그렇게 고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임금으로는 가격 경쟁력이 없었다.

손쉬운 해결책은 노예 노동이었다. 미국 남부에서는 이미 힘든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면화 재배에 투입하면 인도, 이집트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쉬운 해결책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고, 누군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국이 면화 재배를 늘리면서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흑인이 납치되었고, 임금을 받지 않는 미국의 노예와 경쟁해야 하는 인도와 이집트의 노동자들도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아직도 노예제도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겪고 있는 나라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최저 임금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오려는 시도는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최저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들여와야 구성원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회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그런 임시방편이 주는 착시현상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사회는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높이에 차이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물을 채울 경우, 가장 낮은 벽 부분으로 물이 흘러넘칠 것이기 때문에 그 물통으로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가장 낮은 벽 부분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 물통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벽 부분을 높여야 하며, 가장 낮은 부분을 그대로 둔 채 높은 부분을 아무리 더 높게 해보았자 그 물통이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은 하나도 증가하지 않는다.

가장 낮은 벽이 물의 높이를 결정하는 '나무 물통의 법칙'
이미지 출처: LinkedIn

한 사회의 포용력은 그 사회의 가장 소수자 집단이 받는 대우와 존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형제복지원 원생들과 집시들처럼, 가장 낮은 벽 아래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고서도 우리는 물통의 물의 양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 진정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언뜻 사회는 더 깨끗해지고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는 물통의 물은 전혀 증가하지 않고, 차별이득만 가득한 야만적인 사회가 될지 모른다." ('차별의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 본문에서)

이 책을 출간한 위즈덤하우스에서 오터레터 구독자들께 책 10권을 선물하시기로 했어요.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을 통해 의사를 밝혀주세요. 한국 시간으로 수요일 오전에 당첨자를 발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