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된 남자
• 댓글 1개 보기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인 루크 버뱅크(Luke Burbank)는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특이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멀쩡해 보이는 성인 남성인데 슈퍼맨 의상을—망토까지 완벽하게 갖추고—입고 있었다. 공항 게이트에서 봤는데 여행 가방은커녕, 지갑이나 열쇠 같은 소지품도 없었다. 영화 속 슈퍼맨을 생각하면 휴대품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 남자가 정말로 슈퍼맨일 리도 없었다.
'저 사람은 뭘까? 할로윈도 아닌데...'
이상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는 복장이 눈에 띌 뿐, 그냥 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버뱅크는 그곳이 라스베이거스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유명 캐릭터의 의상을 하고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사람들처럼, 라스베이거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유명인을 흉내 내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아마 공연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공항으로 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게이트에 슈퍼맨이 있다는 사실을 안 다른 승객들은 무척 좋아하고 신난 모습이었다. 버뱅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객들이 그렇게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다들 슈퍼맨 의상을 입고 있는 그 남자 얘기를 하며 흘끗흘끗 쳐다봤다.
그 남자는 버뱅크와 같은 비행기를 탔을 뿐 아니라, 그의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슈퍼맨과 같은 비행기에 탔다는 사실에 신이 난 건 승객만이 아니었다. 비행기의 부기장은 기내 방송으로 농담까지 했다. "슈퍼맨께서 머무르신 호텔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객실에 포켓몬 잠옷을 놓고 떠나셨다네요." 그 말에 기내에 폭소가 터졌지만, 그 남자는 희미한 미소만 머금은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비행시간 내내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들은 "슈퍼맨이 왜 비행기가 필요하냐"는 식의 농담이었고, 여자들은 "왜 슈퍼맨 복장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말을 걸 때마다 그 남자는 짧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비행기 안에서 보란 듯이 걸어 다니거나 관심을 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버뱅크는 공공장소에서 슈퍼맨 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치고는 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버뱅크와 같이 여행하던 친구는 "아마 친구와 내기를 했다가 져서 벌로 저걸 입고 비행기를 탄 걸 거야"라고 했다. 버뱅크는 그와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통성명했다. 그의 이름은 마크 와이젠비크(Mark Wyzenbeek).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오번(Auburn)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 후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 장소에 찾아온 마크는 슈퍼맨 의상을 입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슈퍼맨 의상을 입느냐고 묻는 버뱅크의 질문에 마크는 이렇게 답했다.
"기회만 되면 매 주말 입어요. 주중에도 바쁘지 않으면 입고요. 제가 슈퍼맨 의상을 입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걸 입은 저를 보면 기뻐하기 때문이에요. 저를 길에서 보면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슈퍼맨을 봤다"고 얘깃거리가 생기고, 뻔한 일상의 하루가 기억할 만한 날이 되니까요. 장담하는데, 저희가 같이 탔던 그 비행기 조종사들은 지금도 슈퍼맨 얘기를 할 걸요? '내가 비행기에 슈퍼맨을 태운 적이 있다'고요."
버뱅크는 조종사가 포켓몬 잠옷 두고 왔다고 농담한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아뇨. 그런 농담에는 익숙해져요. 게다가 저는 그게 저를 놀린다고 받아들이지 않아요. 기내 방송으로 모든 승객에게 알려주는 건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죠."
마크는 버뱅크를 자기 아파트에 데리고 가서 그가 수집한 피규어들을 보여줬다. 방 2개짜리 아파트는 슈퍼맨과 관련된 물건들로 가득했다. 슈퍼맨 접시, 슈퍼맨 침대와 이불, 슈퍼맨 마우스 패드, 심지어 페이퍼 클립이나 골프티에도 슈퍼맨 로고가 찍혀 있었다. 거실 TV 옆에는 슈퍼맨 의상만 다섯 벌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가 수집하는 건 슈퍼맨 관련 상품만이 아니었다. 실물 크기의 배트맨 마스크만 여덟 개가 사람 머리 모형에 씌워져 있었다. 마치 슈퍼 히어로의 기지에 들어간 듯했다.
마크가 공공장소에서 슈퍼맨 의상을 입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그의 아내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부터다.
"그때까지 저와 가까운 사람 중에 세상을 떠난 경우가 없었죠.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놀랄 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제 아내처럼 젊고 아름다운 누군가가, 앞으로 살날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겁니다. 아내에게는 내일이라는 게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이 제게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걸 깨닫자, 저는 제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대한 즐겁게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죠.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생각하다가 제가 코스튬을 입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저는 슈퍼 히어로 의상을 입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는 게 그렇게 신나고 좋아요. 그럼 그냥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렇게 하기로 한 거죠."
미국에는 마크처럼 독특한 의상을 입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할로윈 날이나, 코믹콘(Comic Con) 같은 행사에 참여할 때만 입는다. 마크는 그런 날을 기다리지 않기로 한 셈이다. 버뱅크는 마크에게 슈퍼맨 의상을 입고 처음 공공장소에 나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물었다.
"제가 슈퍼맨 의상을 처음 완성한 다음에 입고 간 곳은 주유소였어요. 차에 기름을 넣어야 했거든요. 차에서 나와서 주유를 하고 있는데, 주유소 옆 사거리에 빨간불이 들어와 차들이 설 때마다 난리가 난 거예요. 그 순간,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직감했죠.
특히 좋았던 게 뭐냐면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빵빵– 하고 경적을 울리잖아요? 그 사람들은 차 안에서 전부 제 얘기를 하면서 저를 쳐다봐요. '저기 슈퍼맨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자기들을 봐 줄 때까지 빵빵거려요. 그 사람들은 슈퍼맨이 자기를 봤으면 해요. 그래서 제가 고개를 들어서 시선이 마주쳐야 비로소 만족하는 거죠. 그러면 저도, 그 사람들도 신나고 재미있는 경험이 완성되는 거예요."
마크는 오래전부터 슈퍼맨과 관련한 물건들을 수집해 왔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하고 싶은 일에 돈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가진 돈을 다 털어 TV 드라마 슈퍼보이(Superboy, 슈퍼맨의 십 대 시절을 그린 미국 드라마)에서 사용된 오리지널 의상을 산 적도 있다. 그 의상은 딱 한 번 밖에서 입고는 집에 모셔두고 있다. 밖에서 입기에는 너무 특별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재봉을 배워서 의상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버뱅크가 보기에는 마크가 산 의상보다 그가 직접 만든 의상이 더 낫다.
조지 클루니가 출연한 '배트맨'에서 클루니가 직접 입었던 오리지널 배트맨 의상도 샀다. 여름에는 슈퍼맨 의상을 입지만, 겨울에는 배트맨 의상을 입는다. 슈퍼맨 복장과 달리, 안에 발포고무 등의 재질로 채워져 있어서 따뜻하기 때문이다. 마크는 슈퍼맨 복장 위에 겨울 외투를 입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마크는 디테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공공장소에서 입으려면 정말 제대로 해야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성의 있게 입지 않는 건 그 의상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일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실망시키는 일이다. 사무실에서 하는 할로윈 파티라면 40달러짜리 슈퍼맨 코스튬을 입고 가도 상관없지만, 평상시에 공공장소에 입고 나가려면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제대로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웃음거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마크는 체격이 좋아서 슈퍼맨 복장이 잘 어울렸다.
버뱅크는 마크가 아내의 빈 자리를 슈퍼맨, 배트맨 의상으로 채우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슬픔에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건 맞아요. 상실감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뭐라도 도움이 됩니다. 제가 슈퍼맨 의상을 공공장소에서 입고 다니는 걸 아내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저는 아내가 정말 그립습니다. 매일 아내 생각을 해요. 하지만 요즘은 아내가 제가 슈퍼맨 의상을 입고 다니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죠."
마크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슈퍼맨 의상을 입고 바에 간다고 했다. 버뱅크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은 특별 제작한 슈퍼맨 번호판이 붙은 마크의 차에 올라탔다. 번호판만이 아니라, 자동차 핸들과 매트도 슈퍼맨 로고가 붙어 있었고, 차 안 구석구석에 슈퍼맨 관련 물건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운전 중에 빨간 슈퍼맨 부츠에 생채기가 나는 걸 막기 위해 티셔츠 한 장을 바닥에 깔았다.
그는 슈퍼맨에 어울리는 스포츠카를 살까 했지만, 그가 하는 일 때문에 뒷자리가 있는 승용차를 몬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그가 사는 곳에서는 특별히 놀 만한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과 스포츠바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스포츠바에 가기로 결정했다.
취재를 위해 마크를 따라가는 버뱅크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한 사람은 할로윈도 아닌데 슈퍼 히어로 의상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라디오 방송 기자가 사용하는 눈에 띄는 마이크를 들고 헤드폰을 낀 채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 술에 취한 손님들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크는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들떠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이 큰 소리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그런 걸 입고 있어요?" 마크는 "그냥 재미로요"라고 대답했다.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슈퍼맨의 별명)! 용감하네" "범죄를 소탕하라!"
월요일이라 스포츠 바는 손님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대부분 20대였다. 한쪽에 놓인 당구대에서 포켓볼을 하는 그들의 몸에 타투와 피어싱이 눈에 띄었다. 마크는 손님들이 좀 젊다고 했다. 슈퍼맨 의상에 반응을 잘 보이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슈퍼맨을 보고 자란 40대 이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마크는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해서 들고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쪽으로 걸어갔다. 당구대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서서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뻔한 농담을 던졌다.
버뱅크는 자기가 마크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마크의 아내 이야기를 했고, 그들도 마크를 좋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버뱅크와 달리는 마크는 느긋하게 콜라를 마시며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나고, 마크와 버뱅크는 스포츠바를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뭐 이런 걸 입은 이상한 녀석이 있어?"하며 마크와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가슴을 닿을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뱅크는 마크가 길거리에서 슈퍼맨 의상을 입고 다니다가 폭행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첫 번째 폭행을 목격하게 되는 것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크를 노려보던 그 남자가 팔을 뻗어 가볍게 마크를 안았다. 남자들끼리 하는 나누는 그런 인사였고, 그의 표정은 '이런 걸 입고 다니다니, 용감하네' 하고 말하는 듯했다.
바를 나오면서 마크는 버뱅크에게 "사람들이 슈퍼맨 의상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했다. 하지만 버뱅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마크가 슈퍼맨 의상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이 거친 행동이나 말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로 공공장소에 나가면서도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저는 농담도 잘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스몰토크도 잘 못해요. 바에 가서 혼자 앉아 있어 봤자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남들만 쳐다 보다가 오는 거죠. 하지만, 슈퍼맨 의상을 입고 들어가면 달라요. 모두가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마크는 사람들이 그의 의상을 보고 비웃을 때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전부 의상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그건 일종의 자성예언에 가깝다. 비록 그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더라도, 그들에게 웃으며 이야기하면, 그의 태도를 본 사람들 역시 마음을 열고 웃으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거다. 🦦
위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들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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