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본토로 날아든 풍선에 설치된 폭탄 장치다. 이 장치를 빙 둘러서 매달려있는 자루들이 바로 이 풍선의 출발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모래주머니다. 가스를 넣은 풍선이 하늘을 날다가 부력(浮力)을 잃고 고도가 내려가면 이를 감지해서 모래주머니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렇게 해서 가벼워진 풍선은 다시 떠 올라서 고도를 유지하게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 상공에 도착할 때쯤이면 더 이상 모래주머니가 남지 않게 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폭탄이 터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미국 본토에서 발견된 풍선에는 모래주머니가 없었지만,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습득한 풍선에는 미처 떨구지 못한 모래주머니가 두 개 남아 있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 모래를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어느 지역에서 채취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그들의 짐작은 맞았다. 모래 속에든 광물과 미생물의 종류를 분석한 결과, 이 모든 조건을 갖춘 해안은 일본에서도 혼슈섬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풍선들은 일본 본토에서 날려보낸 게 분명했다.

맨 아래 검은 물체와 옆을 향한 흰색 원통이 폭탄. 자루 모양의 물건들이 모래주머니다. (이미지 출처: Smithsonian Magazine)

위의 사진에서 보듯 이 장치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정교한 기술이 동원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체 동력이 없는 풍선을 태평양 너머로 보내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제트 기류라는 지구의 대류 현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제트 기류는 1800년대 미국의 일라이아스 루미스 교수가 그 존재 가능성을 처음 제기했고, 1883년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Krakatoa) 화산이 폭발했을 때 그 존재가 처음 목격되었다. 화산재가 적도를 타고 빠르게 태평양을 건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우연하게도 제트 기류를 실험으로 처음 증명한 사람은 1920년대 일본의 기상학자였다. 오이시 와사부로(大石 和三郎)는 후지산 근처에서 제트 기류를 확인하고 파일럿 풍선(pibal)이라는 측풍(測風) 기구를 통해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오이시는 논문을 영어가 아닌 에스페란토어로 발표하는 바람에 해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20여 년이 흘러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는 아주 유용한 지식이 된 셈이다.

둘리틀 공습에 놀란 일본

일본은 왜 굳이 미국 본토를 풍선으로 공격하려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길지 않은 설명이지만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일본을 위협하는 것을 사전에 저지하겠다는 의도로 진주만에 정박해있던 함선들을 파괴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자국 영토에 기습 공격을 허용한 미국에서는 반드시 일본에 비슷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계획된 것은 이듬해 4월에 미국이 감행한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이다.

사실 일본의 도발은 하와이 진주만에 그치지 않았고, 미국령 괌과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령이었던) 필리핀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고 싶어도 대형 폭격기를 출격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중형 폭격기 16대를 개조해서 항공모함에 싣고 최대한 일본 가까이까지 가서 출격해 본토를 폭격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폭격기(B-25 Mitchell)들이 항공모함에서 간신히 이륙할 수는 있어도 되돌아와 짧은 항공모함 활주로에 착륙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폭격기 편대를 이끈 조종사 제임스 둘리틀(James Doolittle) 중령의 이름을 딴 둘리틀 공습은 '항공모함 출발–일본 폭격–중국에 착륙'이라는 과감한 계획을 갖고 있다.

둘리틀 공습을 설명한 영상

실행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툴리틀 공습은 성공했다. 다만 군수 공장과 군 시설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기리는 했어도 일본에 준 피해가 막대한 건 아니었다. 이 작전의 진정한 성과는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복, "본토는 절대 습격당하지 않는다'라고 자신하던 일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낸 것, 그리고 (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휘젓고 다녔기 때문에) 천황도 안전하지 않다는 심리적 충격을 일본 국민에게 안겨준 것이다. 이게 1942년의 일이다.

둘리틀 공습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수도가 공습당한 사건이라 이번에는 일본이 자존심을 크게 상했다. 9,000개가 넘는 풍선에 폭탄을 실어 미국 본토로 보내는 계획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 9,000개이지 몇 개나 성공적으로 날아갈지 알 수 없고, 본토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 넓은 나라에 줄 수 있는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한 이유는 정체불명의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미국인들에게 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때문이었다.

미국이 강력한 정보 통제에 들어간 건 이런 일본의 생각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풍선 폭탄의 계획과 실행

일본의 계획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게 없던 시절에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방법은 (미국의 둘리틀 공습처럼) 항공모함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출격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일본에도 항공모함이 있었지만 본토 공격에 동원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일본 기상학자가 발견한 제트 기류, 그것도 당시에는 낯설었던 자연현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기류는 도쿄 상공과 미국 본토를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연결하는 편서풍이니 오로지 일본만 사용할 수 있었다. (태평양을 오가는 여객기가 미국 쪽으로 이동할 때 반대 방향에 비해 약 두 시간 정도 덜 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으로서는 제트 기류가 원나라의 일본 공격을 막아주었다는 신의 바람, 카미카제(かみかぜ, 神風)와 비슷한 자연의 선물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원래 수소를 넣은 풍선을 사용해 폭탄을 날려 보내겠다는 아이디어는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미 일본 육군 연구소에 존재했다고 한다. 몇 년간 개발해보다가 1935년에 포기한 프로젝트였는데, 1942년 둘리틀 공습 이후 보복 공격의 방법을 찾던 중에 다시 꺼내게 된 것이었다.

풍선 제작에는 섬유질이 많아서 질긴 일본의 전통 종이 와시(和紙)를 사용했고, 이를 일일이 이어 붙이고 코팅하는 작업은 일본 전역의 여고생 수천 명을 동원했다. 당시 이 작업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에 따르면 학교가 하루아침에 풍선을 제작하는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든 9,300개의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수천 마리의 해파리가 물속을 헤엄쳐가는 듯 보였단다.

일본 여고생들이 폭탄을 실어 보낼 풍선을 만드는 모습 (이미지 출처: The Japan Times)

여기에서 잠깐, 풍선 아래에 붙은 폭탄 장치(글 맨 위의 사진)를 다시 살펴보자. 아래쪽에 붙어 있는 검은색의 물체는 살상용 폭탄이고, 상단에는 옆을 향한 원통 모양의 폭탄도 있다. 이건 소이탄(燒荑彈, incendiary bomb)으로, 화약 약품을 사용해서 화염, 고열을 내뿜는 폭탄이다. 일본은 이 폭탄이 미국 서부에 집중적으로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았다) 따라서 미국 서부 산간 지역이나 수풀이 우거진 지역에 화재를 일으킬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미국 서부에 산불을 일으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 일본은 둘리틀 공습이 있었던 1942년에 잠수함을 미국 서부 오레건주 근처로 보냈고, 이 잠수함에서 출격시킨 수상기를 오레건주 국유림 상공에 띄우고 소이탄을 투하해서 작은 산불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일종의 테스트였고,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판단에 중단된 계획이었지만, 미 서부지역에 산불을 내는 공격은 풍선 폭탄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풍선 폭탄은 성공했을까? 나중에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일본이 보낸 풍선 대부분은 태평양 상공에서 유실되고 10%, 900여개가 횡단에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떨어진 것으로 확인된 풍선은 약 300개 정도다. (전쟁 중에 목격되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약 10여 년에 걸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숲에서 가끔 발견되었다고 한다.)

네모는 풍선이 출발한 곳, 빨간 점은 풍선이 발견된 위치 (이미지 출처: National Geographic)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일본의 계획을 전혀 몰랐던 미국은 처음에는 풍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고, 정체를 알게 된 후에는 정보 통제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풍선의 습격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