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나운 로펌 ②
• 댓글 남기기올해 59세인 앤서니 로메로가 ACLU(미국 시민 자유 연맹)를 이끄는 디렉터가 된 건 30대 중반이던 2001년 9월이다. 미국인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9/11 테러가 일어나기 며칠 전이다.
나는 그해 9월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미국에 온 지 갓 2년이 넘으면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기 시작했던 무렵, 미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도서관에는 건물 정면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미국 국기가 걸렸고, 미국인들은 온통 테러를 이야기하며 슬퍼했고, 공포에 떨고 있었고, 무엇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온 나라가 열병에 걸린 듯 보였다. 가깝게 지내는 미국인들은 "나는 이런 미국이 낯설다"고 할 만큼 다른 나라가 된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인들은 아랍국가들에 분노했고, 그들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9/11 테러리스트들 중에는 미국의 우방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도 있었다. 미국 내에 살고 있던 아랍계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조롱과 욕설을 들어야 했고, 공항에서는 이름과 피부색 때문에 잠재적인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인도인들도 무슬림과 한 데 묶여 비슷한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앤서니 로메로는 ACLU의 디렉터에 취임한 직후 그렇게 변한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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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가 이끄는 ACLU가 처음 맞닥뜨린 상대는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의회가 통과시킨 애국자법(Patriot Act)이었다.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Do not waste this crisis)"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중대한 사건이 발생해서 국민이 불안에 떨 때 정부는 권한을 확대한다. 테러의 재발을 막기 위해 탄생한 이 법은 2015년에 폐지될 때까지 미국 정부가 국내외에 광범위한 도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테러라고 규정할 수 있는 활동을 크게 확대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정부의 권한 확대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 그것이 국민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뤄져도 그렇다. 시민들의 밤길 안전을 돕기 위해 보안용 카메라(CCTV)를 도입하지만, 이는 정부가 원할 경우 시민을 감시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고, 시민이 가진 익명성, 자유를 훼손한다. 하지만 그게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국민 대다수가 "우리는 자유와 권리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면 ACLU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ACLU는 부시 정권이 통과시킨 애국자법이 "고문을 용인하고, 무죄한 미국인을 감시하고, 발언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이를 폐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게 ACLU가 자주 비판을 받는 이유다. ACLU는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바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법과 정책이 헌법을 위반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느냐만 본다. 국민이 바라는 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어도 헌법에 위배된다면 ACLU의 변호사들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내고, 패할 경우 연방 대법원까지 가서 싸운다.
ACLU에 소속된 변호사들이 미국 법무부(검찰) 다음으로 대법원에 자주 드나드는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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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ACLU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아주 바빴다. 이들은 2017년부터 4년 동안 무려 434건의 소송을 진행하면서 트럼프의 인권 침해를 막았다. 대표적인 것이 트럼프 취임 직후, 7개의 이슬람 국가 국민들의 미국 입국을 전면 금지하는 '무슬림 입국 금지(Muslim Ban)'에 맞서 싸운 것이다.
법정 싸움은 길거리 시위와 다르고, 정치인들의 항의와도 다르다. 막연하게 대통령의 명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해서 되는 게 아니다. ACLU의 변호사들은 구체적인 피해자를 찾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케이스(사건)를 구성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ACLU가 바로 그걸 갖추고 있다. 트럼프가 무슬림 입국 금지 행정명령을 내린 게 2017년 1월 27일이었는데, ACLU가 두 명의 피해자를 찾아 소송을 제기한 건 바로 다음 날인 28일이었다.
이 법정 싸움은 1년 넘게 이어지며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5명의 보수 대법관이 트럼프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트럼프는 2차, 3차 행정명령을 내려 수정해가며 ACLU와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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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로메로는 지난주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ACLU가 트럼프 2기 백악관이 쏟아내는 행정명령에 맞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설명했다.
로메로에 따르면 현재 ACLU는 40개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 중인데, 그중에서 로메로가 승리를 확신하는 소송이 트럼프가 행정명령을 통해 폐지하려는 출생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을 지키는 싸움이다. "원정 출산"의 근거가 되는 미국 시민권의 속지주의 원칙은 원래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미국에서 노예로 살았던 흑인들의 후손에게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미국 수정 헌법 14조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배경 이야기가 있고, 오터레터에 '두 노예 주인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4편에 걸쳐 설명했으니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이 헌법 조항 외에도 구체적인 법으로 이 원칙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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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LU를 비롯한 민권단체들에게 수정 헌법 14조는 성스러운 땅입니다. 미국은 이 조항을 통해 노예제도가 만들어 낸 문제를 해결했고, 이 조항을 통해 노예의 자녀들을 미국의 시민으로 만들었습니다. 14조는 또한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가 되게 해줬고,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트럼프가 출생시민권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것은 미국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핵심 원칙은 물론, 이를 규정하고 있는 관련 법률을 부정하겠다는 얘깁니다."
앤서니 로메로는 미국 본토로 건너온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제국을 숨기는 방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푸에르토리코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빼앗은 영토였고, 그곳 주민들에게는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재임기였던) 1917년부터 미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트럼프 백악관의 대변인을 비롯해 많은 미국인들이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땅이고, 그곳 주민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로메로의 아버지는 뉴욕의 한 대형 호텔에서 단순노동을 했는데, 같은 호텔에서도 급여가 더 나은 웨이터로 업무를 바꾸려 했지만 호텔 측에서는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 문제를 자기가 속한 노동조합의 변호사에게 가져갔고, 변호사는 호텔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덕분에 원하는 웨이터 자리를 얻은 로메로의 아버지는 늘어난 수입으로 자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뉴저지로 이사했고, 큰아들인 앤서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한데 이어 훗날 스탠퍼드 법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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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ACLU가 법정에서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막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생비자나 취업비자 등을 통해 미국에 합법적으로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낳은 자녀도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시민권을 갖고 있는데,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나온 이후에 태어난 동생에게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가족이 생이별을 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뿐 아니라, 대대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게 된다.
로메로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재일교포를 예로 들었다. "(출생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독일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국적의 의미를 두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태어나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받는 차별을 보세요. 그들이 미국처럼 출생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즉, 트럼프가 원하는 바를 순순히 손에 넣게 된다면, 재일교포와 똑같은 종류의 차별이 미국에서 벌어지게 된다는 얘기다.
그는 이게 원칙의 문제를 넘어서 미국의 각 주가 트럼프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의 출생증명서에는 부모의 이름만 기록되지 그 부모의 국적이 표기되지 않는데, 각 주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부모의 국적을 확인하는 절차를 넣는다는 것 자체가 워낙 엄청난 작업이라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는 지금 공무원을 대량으로 해고하고 있다.
인터뷰어가 로메로에게 "만약 ACLU가 법정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짧은 답이 돌아왔다. "저희는 안 집니다(We ain’t going to lose)." ACLU는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는 걸까?
'가장 사나운 로펌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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